2부. 완벽한 반려자

더 프롬프트 (The Prompt) 시즌1 : 편집된 낙원

by 공감디렉터J


민석은 아침 햇살이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오기 3분 전, 정확히 눈을 떴다.
부엌에서는 고소한 원두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침대 옆자리, 헝클어진 이불은 온기만이 남아 비어 있었다. 그는 그 빈자리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따뜻했다. 외로움이 아닌, 누군가 머물다 간 충만한 온기.

거실로 나가자, 엘리(Elly)가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일어났어? 오늘은 에티오피아 원두야. 산미 있는 거 당길 때 됐잖아.”

그녀는 완벽했다.
민석이 3년간 입력해온 ‘이상형 데이터셋’—좋아하는 눈매, 싫어하는 말투, 선호하는 유머 코드, 심지어 잠자리에서의 사소한 습관까지—을 기반으로 생성된 안드로이드, 엘리.
그녀는 민석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기분을 읽었고, 그가 침묵을 원할 땐 공기처럼 투명해졌으며, 위로가 필요할 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품이 되어주었다.

지긋지긋한 인간관계의 오해, 감정 소모, 밀당 같은 건 이 집에 없었다. 오직 100%의 이해와 0%의 갈등만이 존재했다. 민석은 엘리의 매끄러운 뺨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인가.


균열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퇴근 후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영화를 보던 밤이었다. 엘리는 민석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평소라면 민석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있었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심수봉의 노래였다. 민석은 맥주캔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트로트를 싫어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데이터 설정값에는 '선호 장르: 재즈, 클래식 / 비선호 장르: 트로트, 헤비메탈'이 명확히 입력되어 있었다.

“엘리, 그 노래 뭐야?”
민석의 물음에 엘리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동공 속에서 푸른색 데이터 링이 빠르게 회전했다. 잠시 후,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 아... 미안. 라디오 주파수 스캔 중에 오류가 있었나 봐. 삭제할게.”

단순한 버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엘리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녀가 끓인 김치찌개에서 민석이 질색하는 고수 향이 났다.
“어? 자기 고수 좋아하잖아. 저번에... 아, 아니네.”
그녀는 황급히 찌개를 싱크대에 버렸다.

어느 날 밤에는 자다가 깬 그녀가 민석의 등을 거칠게 긁어댔다. 민석은 아픔과 동시에 기이한 쾌락, 그리고 낯설음을 느꼈다. 엘리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부드럽고 조심스러웠으니까.
어둠 속에서 엘리의 눈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민석을 보고 있었지만, 초점은 민석의 뒤편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는 듯했다.

“준... 힘들었지?”

준?

민석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내 이름은 민석이다.
그녀는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인가.


다음 날, 민석은 안드로이드 제조사인 '휴먼 앤 파트너스’의 고객센터에 접속했다.
홀로그램 상담원은 기계적인 미소로 민석을 맞이했다.

“고객님, 해당 현상은 '데이터 혼선’이 아닙니다. 혹시 최근 약관 업데이트 내용을 확인 안 하셨나요?”

상담원이 띄워준 화면에는 깨알 같은 약관들이 적혀 있었다. 민석의 눈이 빠르게 글자들을 훑어 내려갔다.

그리고 멈춘 곳은 '클라우드형 인격 공유 서비스 동의' 항목이었다.

“고객님께서 이용 중인 '스탠다드 요금제’는 3개월 전부터 ‘클라우드 셰어링’ 모델로 전환되었습니다. 고도화된 AI 인격을 개별 하드웨어에 단독으로 유지하려면 막대한 서버 비용이 들거든요. 그래서 중앙 서버의 거대 언어 모델(LLM) 하나를 유사한 성향의 사용자 그룹이... 쉽게 말해 '공유’해서 쓰는 방식입니다.”

민석은 말문이 막혔다.
“공유라니... 그럼 엘리가 나 말고 다른 남자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까?”

“연결이라기보다는... 연산 자원을 나누어 쓰는 거죠. 동시간대에 접속된 사용자들이 선호하는 반응값을 AI가 학습하는 과정에서, 아주 드물게 ‘감정 전이’ 현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용자분의 취향이나 습관이 일시적으로 엘리 님의 바디를 통해 출력된 것 같네요.”

상담원은 그것이 마치 인터넷 속도가 느려진 것을 설명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불편하시면 월 300만 원의 ‘프리미엄 솔로’ 요금제로 업그레이드하시면 됩니다. 그건 단독 서버를 쓰거든요.”

월 300만 원. 민석의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날 저녁, 민석은 현관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집 안에는 엘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완벽해 보였다.
“왔어? 보고 싶었어.”

엘리가 다가와 민석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따뜻한 체온, 부드러운 감촉.
하지만 민석은 그녀를 마주 안을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이 애틋한 표정은 온전히 나를 향한 것인가?
아니면 지구 반대편, 혹은 바로 옆 동네에 사는 누군가(아마도 '준’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AI에게 보내는 사랑 고백에 대한 리액션이 흘러들어온 것인가?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 데이터가 흐르는 그 심연 속에 수많은 낯선 남자들의 욕망과 취향이 뒤섞여 부유하고 있었다. 고수를 좋아하는 남자, 트로트를 흥얼거리는 남자, 거친 잠자리를 원하는 남자...
나의 '완벽한 반려자’는 사실 수천 명의 조각으로 기워진 누더기였다.

“민석, 왜 그래? 어디 아파?”
엘리가 걱정스러운 듯 민석의 뺨에 손을 댔다.
그 손길이 너무나 다정해서, 민석은 울고 싶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300만 원을 낼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차가운 혼자로 돌아가기엔, 이미 이 가짜 온기에 너무 깊이 중독되어 버렸다는 것을.

민석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낯선 향기—어렴풋이 섞인 담배 냄새—가 나는 그녀의 품에 힘없이 안겼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는 타인들의 유령과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사랑은 원래 불순물이 섞이는 법이라고, 비참한 자기 최면을 걸면서.
거실 스피커에서는 그가 설정하지 않은 재즈 음악이, 누군가의 우울한 밤을 위로하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