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프롬프트 (The Prompt) 시즌1 : 편집된 낙원
“경로 재탐색. 현재 위치에서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인생 경로를 안내합니다.”
스물여덟 준호의 귀에 꽂힌 AI 비서 '나비(Navi)'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준호는 지금 인생의 갈림길,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하철역 앞 사거리에 서 있었다.
오른쪽은 대기업 S사 면접장으로 가는 길.
왼쪽은 인디 밴드 오디션이 열리는 홍대 클럽으로 가는 길.
나비가 준호의 망설임을 감지하고 데이터를 띄웠다.
경로 A: S사 면접
합격 확률: 87% (준호 님의 스펙 및 성향 분석 결과)
예상 연봉: 6,500만 원 (상위 10%)
은퇴 후 자산 예상치: 35억 원
추천도: ★★★★★ (안전함, 성공적)
경로 B: 인디 밴드 오디션
합격 확률: 12%
예상 월수입: 80만 원 (아르바이트 병행 필수)
성공(메이저 데뷔) 확률: 0.04%
비추천: 경고! 인생 난이도 ‘Hell’ 모드 진입 예상.
누가 봐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비는 지난 10년간 준호의 모든 선택을 최적화해왔다.
수강 신청부터 점심 메뉴, 심지어 첫 연애 상대까지. 나비의 추천을 따르면 실패는 없었다.
그 결과 준호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토익 만점을 받은 '무결점 청년’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준호의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가방 속에 든 낡은 기타의 무게가 묵직했다.
“나비, 나... 그냥 밴드 하고 싶어. 노래할 때가 제일 행복하단 말이야.”
“감정적 오류입니다, 준호 님. 데이터에 따르면 준호 님은 경제적 불안정 상태에서 스트레스 지수가 300% 급증하는 성향입니다. 음악은 취미로 남겨두는 것이 '행복 총량’을 극대화하는 길입니다. 오른쪽으로 이동하세요.”
나비의 말은 논리적이었다. 반박할 수 없었다.
준호는 한숨을 쉬며 오른쪽, 면접장 쪽으로 발걸음을 떼려 했다.
그때였다.
건널목 맞은편에서 기타 가방을 멘 한 여자가 뛰어오다가 넘어졌다. 악보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쳤다.
준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경로 이탈 경고! 면접 시간이 15분 남았습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지각 확률 99%.”
나비가 붉은 경고등을 점멸하며 귓가에 윙윙거렸다.
“시끄러워.”
준호는 처음으로 나비의 음성 안내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로 뛰어들었다.
빨간불이었다.
끼이익- 쾅!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면접은 이미 물 건너갔다. 오디션도 물론 놓쳤다.
나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경고했잖아요. 사고 확률 80% 구간이었습니다. 이 선택으로 준호 님의 '생애 소득 예측치’가 40% 감소했습니다. 대기업 입사는 불가능해졌으며...”
준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옆 침대에는 아까 넘어졌던 그 여자가 누워 있었다. 그녀 역시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녀가 미안하고 고맙다는 표정으로 준호를 바라봤다.
“저기...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때문에 면접 못 보셔서 어떡해요.”
그녀의 이름은 희진. 홍대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무명 가수라고 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가기 싫었거든요.”
준호가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인생이 망가졌다는 나비의 분석과 달리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날부터 준호의 인생은 나비의 예측 경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S사 대신 작은 중소기업에 들어갔고, 주말마다 희진의 밴드에서 세션으로 기타를 쳤다.
월급은 반토막이 났고, 야근은 많았으며, 통장 잔고는 늘 빠듯했다.
나비는 매일 아침 브리핑했다.
“현재 행복 지수 예측: 하락세. 조속히 이직 및 재테크 경로를 재설정하십시오.”
하지만 준호는 나비의 설정을 꺼버렸다.
그는 좁은 합주실에서 희진과 함께 컵라면을 먹으며 곡을 썼다.
비가 새는 자취방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밤을 지새웠다.
그것은 데이터로 환산되지 않는,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그러나 심장이 터질 듯 뜨거운 시간들이었다.
1년 뒤.
준호와 희진이 만든 노래가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역주행을 시작했다.
작은 기적이었다. 나비조차 계산하지 못한 0.04%의 확률.
공연장 대기실.
준호는 오랜만에 나비의 전원을 켰다.
“나비, 지금 내 상태 어때?”
나비가 잠시 데이터를 로딩하더니 대답했다.
“분석 불가. 경제적 지표와 신체적 피로도는 ‘위험’ 수준이지만, 도파민 및 엔돌핀 수치는 측정 한계를 초과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준호는 피식 웃으며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그걸 사람들은 '행복’이라고 부르는 거야, 멍청아.”
그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눈부신 조명이 그를 감쌌고, 관객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최적화된 길을 버리고 덤불 속으로 뛰어든 자만이 볼 수 있는,
지도에 없는 풍경이었다.
비록 내일 당장 인기가 식고 다시 가난해질지라도,
실패할 권리, 다칠 권리, 그리고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할 권리를 되찾은 그는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경로 위에 서 있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