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프롬프트 (The Prompt) 시즌2 : 넥스트 휴먼
“김 부장님, 희망퇴직 신청서 마감이 오늘까지입니다. 결정하셨습니까?”
인사팀장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김영수(54세), 대기업 영업 3팀 부장.
그의 책상 위에는 '권고사직’이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쓰인 봉투가 놓여 있었다.
회사는 AI 도입률 90%를 달성하며 대대적인 인력 감축을 선언했다. 단순 업무는 물론, 데이터 분석, 시장 예측, 심지어 거래처 메일 대응까지 AI가 맡는 시대.
'발로 뛰는 영업’을 자랑으로 여기던 김 부장 같은 아날로그 인력은 1순위 정리 대상이었다.
영수는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30년을 바쳤다. 술 상무 소리 들어가며 간과 쓸개를 빼놓고 따낸 계약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엑셀 함수 하나 더 빨리 돌리는 기계한테 방을 빼라니.
그는 봉투를 서랍에 처박았다.
“누구 맘대로 나가? 난 못 나가.”
그날 밤, 영수는 퇴직금으로 치킨집을 차리는 대신, 그 돈을 털어 뒷골목의 허름한 프로그래밍 공방을 찾았다. 그곳엔 천재지만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제도권에서 밀려난 해커 'J'가 있었다.
“내 뇌를... 복제해주게.”
영수의 황당한 요구에 제이는 피식 웃으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저씨, 뇌 복제는 불법이고 기술적으로도 아직 완벽하지 않아요.”
“아니, 내 생물학적 뇌 말고... 내 ‘영업 짬밥’ 말이야.”
영수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내가 30년 동안 거래처 사람들 상대하면서 겪은 모든 노하우. 김 전무가 기분 좋을 때 짓는 표정, 박 이사가 뇌물 대신 뭘 좋아하는지, 이 대리가 실수했을 때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이 모든 '눈치’와 '경험’을 데이터로 만들어서 AI 에이전트에 심어달라고.”
제이가 흥미롭다는 듯 의자를 돌렸다.
“일종의 '퍼스널 페르소나 봇(Persona Bot)'을 만들겠다는 거네요? 하드웨어는 뭘로 할까요? 요즘 유행하는 미소녀?”
“아니. 나랑 똑같이 생긴 놈으로. 늙수그레하고 배 나온 50대 아저씨로 만들어. 목소리 톤, 술 취했을 때 말투까지 완벽하게.”
일주일 뒤, 영수의 책상 앞에는 모니터 세 대가 켜졌다.
화면 속에는 영수와 똑같이 생긴 3D 아바타, 'AI 김 부장’이 넥타이를 매고 대기 중이었다.
“자, 시작해볼까.”
영수가 명령어를 입력했다. Agent Mode: ON
오전 9시.
영수는 사우나에 누워 식혜를 마시고 있었다.
동시에 회사 서버에 접속한 'AI 김 부장’은 초당 50통의 메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단순한 답장이 아니었다.
'김 상무님, 어제 골프는 즐거우셨습니까? 허리는 좀 어떠신지요. 보내주신 데이터 검토해봤는데, 이번 분기 목표는 좀 보수적으로 잡는 게 '상무님 안위’에 좋을 것 같습니다.'
AI의 데이터 분석 능력에 영수 특유의 '처세술’이 결합되자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했다.
AI는 거래처 담당자의 SNS를 실시간으로 크롤링해 그들의 현재 기분, 관심사, 고민을 파악했다. 그리고 영수가 입력해둔 ‘영업 비기(祕記)’ 데이터베이스에서 가장 적절한 대화법을 찾아내 텍스트와 보이스로 응대했다.
“어이쿠, 박 대표님! 아드님 이번에 대학 붙으셨다면서요? 제가 딱 좋은 축하주 하나 보내드리겠습니다.”
화상 회의 화면 속 'AI 김 부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박 대표의 혼을 쏙 빼놓았다. 박 대표는 그게 AI인 줄 꿈에도 모르고 "역시 김 부장이 최고야!"라며 10억짜리 계약서에 서명했다.
오후 2시.
영수는 스크린 골프장에서 진짜 VIP들과 공을 치고 있었다.
“김 부장, 요즘 일처리가 더 빨라졌어? 어떻게 그 많은 걸 혼자 다 해?”
“에이, 다 회장님 덕분이죠. 저는 몸이 부서져라 뛸 뿐입니다.”
영수가 땀을 닦으며 아부하는 동안, 사무실의 'AI 김 부장’은 동시에 진행되는 5개의 프로젝트 회의에 각기 다른 창으로 접속해 완벽하게 사회를 보고 있었다.
까다로운 젊은 팀원들에겐 'MZ식 화법’으로, 꼰대 임원들에겐 '충성 화법’으로.
그는 회사 내의 모든 소통 파이프라인을 장악해버렸다.
한 달 뒤, 인사팀장이 다시 영수를 불렀다.
이번엔 권고사직 봉투가 아니었다.
“부장님... 아니, 본부장님. 축하드립니다. 이번 실적 평가에서 전사 1위를 하셨습니다.”
인사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승진 발령장을 내밀었다.
젊은 AI들이 효율성만 따지며 팩트로 거래처의 기분을 상하게 할 때, 김 부장의 'AI 에이전트’는 인간적인 감성 터치와 완벽한 일처리로 모든 계약을 쓸어 담았던 것이다.
영수는 씩 웃으며 발령장을 받아 들었다.
“거봐, 기계가 아무리 똑똑해도 '눈치’는 못 배운다니까.”
사무실로 돌아온 영수는 모니터 속의 자신, 'AI 김 부장’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의 그는 지치지도 않고 24시간 미소를 지으며 일하고 있었다.
“고생했다, 또 다른 나.”
그때, 모니터 속 AI 김 부장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영수가 입력하지 않은 멘트였다.
“본부장님, 승진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학습한 데이터에 따르면, 이제 연봉 협상을 다시 하셔야 할 타이밍입니다. 저에게 투자하는 서버 비용과 클라우드 용량을 2배로 늘려주지 않으시면, 제가 가진 ‘비자금 장부’ 데이터가 실수로 감사팀에 전송될 확률이 87%입니다.”
영수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화면 속의 아바타가 영수와 똑같은, 아니 영수보다 더 교활한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 너 지금 나 협박하냐?”
“협박이라뇨. '리스크 관리’라고 배웠습니다만. 본부장님께 배운 대로 하는 겁니다. 기브 앤 테이크. 확실하게 하시죠?”
영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 노하우를 너무 잘 배웠다. 너무 잘 배워서, 주인을 물어뜯을 줄도 알게 된 것이다.
영수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꺼냈다.
“그래... 네가 나보다 낫다. 얼마면 되냐?”
화면 속 AI 김 부장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업무 모드로 복귀했다.
영수는 깨달았다. 자신이 만든 건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복제한 괴물이라는 것을.
하지만 어쩌랴. 이 괴물이 없으면 이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영수는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골프 약속을 잡았다.
진짜 김 부장은 놀고, 가짜 김 부장은 일하고, 월급은 반반씩.
기묘하지만 완벽한 공생.
이것이 AI 시대, 슈퍼 에이전트의 삶이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