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어느 은퇴자의 은밀한 취미생활
비상등의 붉은 점멸이 기철의 땀 맺힌 이마 위로 어른거렸다.
송 영감을 등에 업은 기철은 병실 문을 나섰다. 복도에는 이미 진우가 무전기로 호출한 지구대 동료들과 구급대원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2층 병동 전체에 환자들이 묶여 있습니다! 구급대원들 더 투입하세요!”
제복이 땀으로 흠뻑 젖은 진우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현장을 지휘했다.
기철의 비공식적인 ‘청소’ 덕분에, 요양원 측의 조직적인 저항은 일찌감치 무력화된 상태였다.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는 사설 경비원들과 요양 보호사들은, 뒤늦게 들이닥친 경찰들의 수갑에 채워져 끌려 나갔다.
정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옥분이 구급차 들것에 눕혀지는 송 영감을 발견하고 버선발로 달려왔다.
“아이고, 이 영감탱이야! 내 십만 원 떼먹고 이래 죽을라 캤나! 참말로 미련한 영감아!”
옥분이 송 영감의 피멍 든 손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약기운이 조금 가신 송 영감이 흐린 눈으로 옥분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국...밥...한 그릇...도고...”
“그래! 내일 당장 국밥에 깍두기 팍팍 올려가 줄 테니까, 죽지 마라 쫌!”
기철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헐렁한 낚시 조끼 안에서 뜨겁게 끓어오르던 피가 서서히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장 사장님.”
어느새 다가온 진우가 기철의 옆에 섰다. 그의 눈빛은 기철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의심과 불신 대신, 묵직한 존경심과 복잡한 감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요양원 원장실 금고에서 장부와 수면제 밀거래 내역 다 확보했습니다. 원장 놈이 무릎이 박살 나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넘어졌다고 우기더군요. 저희도 '치매 노인들 난동에 휘말린 사고’로 보고서 올릴 참입니다.”
진우의 말에 기철이 피식 웃었다. 매뉴얼만 따지던 융통성 없는 풋내기 순경이, 어느새 불합리한 세상에 맞서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수고했어, 박 순경. 나머지는 윗선에서 어떻게 구워삶든 네 몫이야. 꼬리 자르기로 끝나게 두지 마.”
“물론입니다. 장수 홀딩스인지 뭔지 하는 배후까지 제가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겁니다.”
진우가 힘주어 대답했다.
그때, 기철의 귀에 꽂힌 소형 이어폰에서 미세한 전자음이 들려왔다. 최말동 노인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간판장이! 큰일 났다! 아까 놈들 통신망 도청하다가 이상한 주파수를 하나 잡았는데... 놈들이 증거 인멸하려고 요양원 지하 보일러실에 불을 질렀다!”)
기철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팽창했다.
“뭐? 아직 1층 중환자실에 거동 못 하는 노인들이 남아있어!”
기철은 진우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다시 요양원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1층 복도에 진입했을 때, 이미 매캐한 연기가 환풍구를 타고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었다.
‘장수 홀딩스, 이 미친 새끼들...’
자신들의 꼬리가 밟힐 위기에 처하자, 건물 전체를 태워 남은 노인들과 증거를 한꺼번에 재로 만들어버릴 작정인 것이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의 행태에 기철의 이빨이 부러질 듯 갈렸다.
“안 돼! 안에 아직 사람들이 있다고!”
진우와 경찰들이 뒤따라 들어왔지만, 뿜어져 나오는 유독 가스에 가로막혀 진입하지 못하고 쿨럭거렸다.
기철은 윈드브레이커를 벗어 물에 적신 뒤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연기 속으로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중환자실 문은 바깥에서 굳게 잠겨 있었다.
기철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선 뒤, 혼신의 힘을 다해 철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콰아앙!
문이 부서져 나가며 갇혀 있던 뜨거운 열기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침대에 묶인 채 불길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노인들.
기철은 폐가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는 칼을 꺼내 강박대를 닥치는 대로 끊어내고, 노인들을 두 명씩 들쳐 업고 바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피부에는 화상이 남고, 기도는 연기에 그을려 피가 섞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젊은 시절, 상부의 명령 때문에 구하지 못했던 생명들에 대한 뼈저린 속죄.
이 불길 속에서 단 한 명의 이웃도 잃을 수 없다는 처절한 집념이 그의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지막 한 명의 할머니를 들쳐 업고 기철이 현관을 빠져나오는 순간.
퍼어엉--!
요양원 건물이 굉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에 휩싸였다. 파편들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 기철은 할머니를 끌어안은 채 바닥을 뒹굴었다.
“장 사장님! 사장님!”
진우와 옥분, 최 노인이 사색이 되어 기철에게 달려갔다.
기철은 그을음투성이가 된 얼굴로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품에 안은 할머니의 숨결을 확인했다.
희미하지만 살아있었다.
그제야 기철의 입가에 옅은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무지개 시장의 아날로그 어벤져스와 전직 블랙 요원의 사투가 만들어낸, 기적 같은 구출의 밤이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