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멍든 기억들

[시즌 1] 어느 은퇴자의 은밀한 취미생활

by 공감디렉터J


무지개 시장, '제일 인쇄·간판’의 셔터가 내려진 깊은 밤.

어둑한 인쇄소 구석에 기철과 강옥분, 최말동, 그리고 경찰 제복을 벗은 평상복 차림의 박진우 순경이 모여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기철이 요양원에서 찍어 온 송 영감의 피멍 든 팔과, 강박대에 묶여 방치된 노인들의 참혹한 사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이 호로새끼들! 이게 사람 새끼들이 할 짓이가!”
옥분이 사진을 집어 던지며 오열했다. 평소의 불같은 성격은 온데간데없고, 오랜 이웃이 당한 끔찍한 학대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최말동은 담배만 연신 뻐끔거리며 붉어진 눈시울을 훔쳤고, 진우는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운 신음을 뱉어냈다.

“제가... 제가 내일 당장 서장님한테 보고해서 압수수색 영장 치겠습니다. 이건 명백한 노인복지법 위반에 특수상해입니다!”
진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섰다. 하지만 기철의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듯 차갑게 그를 막아 세웠다.

“앉아, 박 순경.”
“하지만 장 사장님! 저 사진들이 증거잖습니까!”

“그 사진들은 내가 불법 침입해서 몰래 찍은 거라 법적 효력이 없어. 게다가 네가 영장 신청하는 순간, 경찰서 내부에 있는 놈들의 정보원이 요양원 쪽에 미리 귀띔을 하겠지. 놈들은 치매 노인들이 자해해서 생긴 상처라고 우길 거고, 향정신성 약물은 처방전 들이밀면 그만이야.”

기철의 말에 진우가 털썩 주저앉았다.


기철은 책상 위에 놓인 요양원 재단 관련 서류들을 가리켰다.

“이 요양원, 단순한 학대 시설이 아니야. 입소한 노인들의 생명보험 수급자를 재단 명의로 돌려놓고, 약물 투여와 방임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이른바 '합법적인 살인 공장’이야. 그리고 죽은 노인들의 장례비용과 유산까지 싹 다 가로채고 있지.”

기철이 서류 더미 속에서 익숙한 로고가 찍힌 문서를 하나 꺼냈다.
‘장수 홀딩스’

“보이스피싱, 떴다방, 요양원. 놈들은 고령화 시대의 노인들을 완벽한 수익 모델로 삼고 있어. 돈을 뜯어내고, 병들면 가두고, 마지막엔 죽여서 보험금까지 타먹는 거대한 시스템.”

기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의 머릿속에 15년 전, 시리아의 어느 지하시설에서 보았던 끔찍한 광경이 플래시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반군들에게 끌려가 강제로 생체 실험을 당하고, 결국 장기까지 적출당한 채 버려졌던 무고한 민간인들의 시체 더미.

그때 그는 명령에 복종하느라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상부의 '작전 우선’이라는 명분 아래, 눈앞의 죽음들을 방관해야만 했던 지독한 무력감과 후회. 그것은 기철의 영혼을 갉아먹는 가장 깊은 상처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를 옭아매는 명령도, 지켜야 할 국가의 체면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머리를 단정하게 이발해주던, 인쇄소 셔터를 올릴 때마다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주던 이웃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직접 들어가서 송 어르신과 갇혀 있는 노인들을 빼내 올 거다.”
기철의 낮고 단호한 선언에 진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장 사장님, 혼자서요? 그 안엔 사설 경비원들이 득실거립니다. 자칫하면 사장님도 위험해져요!”

“혼자가 아니다.”
기철이 진우의 어깨를 묵직하게 짚었다.

“최 어르신은 요양원 일대의 보안 시스템과 통신망을 마비시켜 주실 거고, 옥분 누님은 외부에서 놈들의 시선을 끌어줄 겁니다.”

기철의 시선이 진우를 향했다.
“그리고 박 순경. 넌 네가 할 수 있는 ‘합법적인’ 일을 해. 내가 안에서 놈들을 쓸어버리고 노인들을 구출해 내면, 넌 정당하게 놈들을 체포하고 구급차를 불러. 이건 공조가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사냥을 하는 거다.”

진우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경찰의 매뉴얼과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명백한 불법 작전. 하지만 시스템이 방치한 참혹한 진실 앞에서, 젊은 순경의 심장엔 뜨거운 불이 지펴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관할 지구대 순찰차 동선은 제가 다 빼놓겠습니다. 구급차도 미리 대기시켜 놓죠.”
진우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철은 인쇄소 안쪽에 덮어두었던 검은색 캔버스 백의 지퍼를 열었다.
둔탁한 금속음을 내며 전술 나이프, 연막탄, 그리고 해체용 도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일 밤 12시.”

기철이 전술 장갑의 벨크로를 거칠게 조이며 말했다.
“요양원의 문을 닫는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