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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모 May 15. 2019

러시아가 사랑한 시인 푸시킨의 아파트

당신은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나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드르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우울한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올 것임을 믿어라.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의 우울함은,

순간적인 것이며 지나갈 것이다.

지나간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마라” 이 구절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했었는데 이 시는 러시아가 사랑한 시인 푸시킨의 시 구절 중 하나였다. 러시아 사람이라면 그의 시 하나쯤을 외우고 다닌다는 국민 시인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는 푸시킨이 살았던 아파트를 박물관으로 꾸며놓은 곳이 있다. 그곳에 가면 그가 살았던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 그의 삶을 엿보는 것만 같다. 내가 시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시보다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랑을 위해 결투를 하다 사망한다. 시인의 죽음은 영화나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한 이야기다. 이 곳에서 그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웅장하고 넓은 러시아의 건축물과 다르게 아담하고 따뜻한 느낌의 박물관에 들어서자 그의 삶이 느껴진다. 나도 그의 지인이 되어 그의 아파트에 초대된 상상을 해보았다^^


1836년 11월 4일 그는 한통의 익명의 편지를 받는다.

시인의 아내 나탈리아 곤잘로바가 남편을 배신하였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절세 미녀였던 시인의 아내에게 계속적으로 추근대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단테스가 푸시킨의 명예를 훼손시키고자 쓴 편지라고 의심한 그는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였다. 결투는 주변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단테스는 그녀의 언니와 결혼을 하고, 파렴치하게도 계속 나탈리아를 쫓아다닌다. 더는 참지 못한 푸시킨은 다시 결투를 신청한다.


1837년 1월 27일 결투가 시작되었다.

비열한 단테스는 결투 지점 한 발자국 전 총을 먼저 쏜다. 푸시킨은 결국 오른쪽 배에 큰 총상을 입고 모이카 강 근처의 지금 이 집으로 실려오게 된다.

결투 시 사용했던 총과 총상을 입은 푸시킨

1837년 1월 27일에서 1월 29일

나탈리아는 이틀 밤을 잠 못 이룬 채 문 옆의 소파에서 지내며 이콘을 보고 기도한다. 문 너머로는 푸시킨이 총상의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아프면 소리를 내세요”라는 의사의 말에 푸시킨은 “소리를 내면 아내가 들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푸시킨 가문의 이콘을 보며 기도하고 문 너머의 작은 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을 나탈리아가 떠오른다.

시인의 서재에서 그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
14개의 유럽과 아시아 언어의 4000여 권의 책이 있는 이 서재에서 시인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탄생했다. 결투 날 아침에도 그는 일찍 일어나 서재에서 많은 일을 했다. 발간 잡지를 위해 작가 이시모바에게 번역 요청을 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는 넵스키대로에 있는 볼프 과자점에 가서 결투 지점으로 출발했다. 그 과자점은 현재까지도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시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결투 후 총상을 입은 시인은 집으로 와 서재에 있는 소파에 눕혀 이틀을 보낸다. 그의 혈흔이 남아 있는 소파와 조끼가 아직도 보관되고 있다.
시인 주콥스키가 푸시킨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 그는 마지막으로
“삶이 끝났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눌리고 있다.”라고 남기며 사망했다고 한다.시계는 1837년 1월 29일 오후 2:45를 가리키고 있었다.

푸시킨의 조끼와 그의 서재. 책상 옆의 시계는 그의 사망시간인 2:45을 가리키고 있다.

1월 29일 저녁, 푸시킨과 작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 현관에 모였다.
첫 번째 영결식에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추모를 하러 온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사망 후 다음 날 역사학자 예카테리나는 아들에게 푸시킨 죽음에 대한 슬픔을 편지로 전하며 말했다. “러시아는 푸시킨을 잃었다”

현관에 전시되어있는 마지막 푸시킨의 모습/사후 마스크와 머리카락. 1월 30일 이반 투르게프 학생 요청으로 그의 머리카락이 보관되었다. 이반 투르게프는 훗날 유명한 작가가 된다.

어쩌면 무모하다고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숱한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고 38세의 나이에 여자 때문에 죽다니.. 그래도 나는 푸시킨의 무모하지만 용기 있는 그래서 더 안타까운 사랑에 매료되었다. 누구나 이런 사랑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의 마음은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차 시야를 가린 말처럼 옆을 볼 새가 없이 그냥 달려 나갔나 보다. 그런 뜨거움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기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탄생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시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의 시 구절이 더 가슴 깊게 울린다.

푸시킨이 나탈리야를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와 그가 보낸 연애편지들/ 푸시킨 박물관 앞의 표식, “1837년 1월 29일 푸시킨이 여기서 생을 마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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