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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Jul 27. 2021

분홍꽃 그림이 새겨진 보랏빛 유카타

Jul 22, 2016

얼마 전 직장으로 웬 노년 여성이 날 보겠다며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지금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과거 국제 교류를 담당했던 과장이었다고 소개했다. 몇 해 전 정년 퇴임을 하여 이제는 취미 생활을 즐기는 중인데, 그 취미란 게 유카타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대뜸 내게 유카타 한 벌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날은 내 키가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해서 찾아온 것이라 했다. 그는 나를 위에서 아래까지 한번 쑥 훑어보고는 ‘생각보다 크네’라며, 내게 다 들리도록 혼잣말을 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보이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되었을 것이다. 오늘 직장으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일전에 약속한 유카타가 완성되었으니 시간이   가지러 오라는 그의 전화였다. 아무리 예전에 국제 교류를 했던 사람이라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내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 일인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던 어머니 말씀이 떠오르면서, 어쩐지  미덥지 못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몫으로 만들었다는데 그걸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오후 근무 시간 중에 잠시 짬을  받으러 가겠다고 했다.


그는 내 앞으로 보라색 보자기로 곱게 싼 꾸러미를 내밀었다. 보자기를 풀자 안에서는 직접 만든 유카타와 오비, 자신이 신던 것이라는 게타, 그리고 기쓰케(着付け)에 필요한 각종 소품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은 건, 유카타를 입는 데 필요한 정보를 일일이 수기로 쓰고 그린 설명서였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서도 이만한 정성이 담긴 선물을 받은 기억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을 크게 벗어난 선물 앞에서, ‘고맙다’는 말로만 감사를 표하기엔 어딘지 부족한 느낌이 들어, 머릿속으로 마땅한 단어를 고르고 있는 내게 그는 덤덤히 말했다.


“예전에 내가 교류 과장을 할 때도 한국인 교류원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내가 그녀한테 충분히 잘해주지 못했거든요. 그녀가 갑자기 떠나고 나서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좋아하던 한국 드라마도 보지 못하겠더라고요. 이 유카타는 그때의 미안한 마음 때문에 만든 것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주길 바라요. 아무쪼록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길 바랍니다.”


잘해주지 못한 기억과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누군가와 그리하여 생겨난 마음의 빚. 선물로 받은 분홍꽃 그림이 새겨진 보랏빛 유카타에는 그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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