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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Aug 22. 2021

외로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Summer, 2016

다이센시에 처음 도착한 날, 역으로 나를 마중 나온 사람들과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던 와중에, 느닷없이 역 건물 한쪽 벽면에 세워져 사진을 찍혔다. 웬만큼 아는 사람들 앞에서 사진이 찍히는 것도 어색한 일인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사진을 찍혀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이 사진은 다음 달 시정 홍보지에 ‘다이센시에 어서 오세요. 신임 국제 교류원’이라는 타이틀로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물론 그 사진이 그렇게 쓰일 거라고 미리 일러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 전 직장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시정 홍보지에 실린 신임 한국인 교류원을 모임에 초대하고 싶다는 전화였다. 그 사진을 보고도 용케 초대하려는 마음이 들었구나 싶었다. 모임의 이름은 무궁화 서클.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만든 동호회라고 했다. 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역 앞에 있는 한국 음식점에서 모임을 가지는데, 곧 이달의 모임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전화의 용건은 그 모임에 내가 참석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실제 한국인에게 한국 문화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무궁화 서클의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직접 가보니 한국 문화 전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아니라, ‘욘사마’로 대표되는 1세대 한류 팬들이 모인 자리 같았다. 짧은 내 소개가 끝나자마자, 열명 남짓한 회원들은 서로 앞다투어 요즘 빠져 있는 한국 드라마 이야길 꺼내기 시작했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 나는, 그들의 대화에 좀처럼 끼지 못하고 금세 겉돌았다. 다행히 사람들도 내 존재를 점차 잊어가는 듯했다. 그래서 모임의 중반부터는 그들이 하는 말을 가만 듣고만 있었는데, 듣다 보니 이들의 화법에는 어딘지 좀 독특한 데가 있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음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와 동시에 다음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앞사람의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오직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시작하고 끝맺기를 반복했다. 그건 대화라기보다는 차라리 독백에 가까워 보였다. 그들이 드라마에 대해 각자의 이야기를 열변하는 동안, 내 앞에서는 드라마에 관한 열 편의 모노드라마가 상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고독한 연기자 같기도 했고, 벽면에 대고 홀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는 외로운 술래 같기도 했다. 한국인이 꼭 필요한 자리 같지는 않아, 이후 모임에 더는 나가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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