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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Aug 24. 2021

오늘의 소원

May 8, 2016

내가 평소 남들보다 잘하는 일 중 하나는 소원을 비는 것이다. 밤중에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보름달을 보면 소원을 빌고, 낯선 이름의 살별이 지구에 가장 가까워진다는 밤에는 일부러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빈다. 해돋이나 해넘이를 보면서도 소원을 빌고, 믿음과 관계없이 관세음보살이나 성모 마리아 상을 보고도 소원을 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일월성신과 천지신명에게 소원을 빌 때도 있다. 산길을 걷다 소원 돌탑을 발견하면, 꼭 내 몫의 돌멩이 하나를 올리고 와야 흡족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소원을 빌었다. 그중 어떤 소원은 이루어졌고 어떤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제껏 소원을 비는 일에 별다른 회의감이 들지 않는 걸 보면, 소원의 성취 여부에는 애당초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틈날 때마다 아무런 소원을 헤프게 빌고 다니는 스스로가 겸연쩍게 느껴질 만큼, 신전 앞에 선 N의 표정은 진지했다. N은 같은 과 관광팀에서 근무하는 동료다. 그의 첫인상은 도회적이었다. 키가 크고 스타일이 세련돼, 직원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풍기는 분위기가 어쩐지 시골의 관공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는데, 2년 전까지 지바(千葉)에서 수학 선생님을 했다고 한다. 얘기를 듣고 보니, 과연 수학 선생님 다운 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성격은 털털하고 다정해서, 타지에서 홀로 지내는 나를 무심한 척 세심하게 챙겨주고 있다. 얼마 전에는 동기들 회식 자리에 불러주었고, 오늘은 요가 수업에 가지 않겠느냐고 먼저 제안해 주었다. 그렇게 함께 요가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근처에 유명한 신사가 하나 있는데 들러볼래?”


N이 말한 유명한 신사란, 교와 지역에 있는 ‘가라마쓰 신사(唐松神社)’를 가리켰다. 분명 유명한 신사라 하였는데, 막상 가보니 주차장도 경내도 인기척 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300년을 넘게 살았다는 삼나무들이 울창하게 늘어서 있는 참배길만이 그나마 외롭지 않게 보였다. 시골에 있는 신사란 본래 이렇게 괴적한 것일까. 그런 무용한 생각을 하며 N을 따라 걷는데, 눈앞에 독특한 형태의 신전 하나가 나타났다. 신전의 이름은 아마쓰히노미야(天日宮). 크고 작은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석가산 위에 신전이 있고, 그 주위를 연못물이 감싸며 돌고 있는 형태였다. 대충 살펴보더라도 이제껏 보아온 다른 신사의 신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보기 드문 신전이네요.’하자, N은 가라마쓰 신사가 유명한 이유는 이 신전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신전 뒤편에 돌이 세 개 있다. 신전을 세 번 돌면서 이 돌들을 정해진 대로 만지면 아이가 생기거나 순산한다고 한다. 이게 제법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서, 전국 각지에서 난임 부부나 출산을 앞둔 부부가 찾아온다. 나는 스물다섯에 결혼을 했는데, 아직 아이 소식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속는 셈 치고 나도 한 번 소원을 빌어보려고 한다. N은 거기까지 말하곤 돌계단을 따라 신전으로 다가갔다. 소원이 이뤄질 거예요. 소원이 이뤄질지도 몰라요. 소원이 이뤄지길 바라요. 나는 속으로 생각한 말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신전의 종소리가 고적한 경내에 울려 퍼졌다. N은 2례 2박수 후에 합장을 하고 오래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는 신전을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돌고 또 도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그의 소원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다.



부기.

2021년 현재 그는 귀여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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