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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Aug 25. 2021

달려라, 자존호!

Jun 4, 2016

낡은 자전거가 한 대 있다.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고 물려받았다. 다이센시에 한국인 교류원은 내가 세 번째인데, 초대 교류원 때부터 써오던 것이라 한다. 앞쪽에 바구니가 달린 감색 자전거로, ‘チャジョン号’라는 이름도 있다. 일본식 발음으로 ‘챠죤고’라고 읽는다. 우리말인 ‘자전거’와 비슷하도록 붙인 이름이라는데, 누가 붙였는지는 몰라도 평소 작명보다는 말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짓이 아닐까 싶다. 이 ‘챠죤고’를 우리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쓰면 ‘자존호’가 된다. 나는 자전거의 발음을 어설프게 흉내 낸 챠죤고보다, 이 자존호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 자기의 존재를 뜻하는 자존(自存)과 자기의 품위를 스스로 지킴을 뜻하는 자존(自尊)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이 자존호에 대해서 더 말하자면, 생김새가 딱할 정도로 볼품이 없다. 언젠가 심하게 넘어진 일이 있는지 바구니는 한쪽이 우그러졌고, 다년간 설국의 황천에 호되게 당해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프레임 곳곳은 녹이 슬었다. 세 번째 주인인 나는 자존호의 사정을 어레짐작 할 뿐이지만, 아무래도 나만큼 험한 세월을 보내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래도 두 바퀴만은 여전히 성해서 달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직장 동료 중 하나가 아무리 그래도 새것을 사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웬만하면 자존호를 계속 타고 싶다고 답했다. 사실 새것을 탈 때처럼 흠이 날까 마음을 졸이며 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자존호의 가장 큰 장점이니까.


요즘 내 취미는 자존호를 타고 달리는 일이다. 한국에서도 자전거를 탈 줄은 알았지만, 성인이 되고서는 제대로 타본 적이 없다. 못 탔다기보다는 일부러 안 탔다. 남들보다 예민하게 발달한 걱정 회로 때문이다. 차와 사람이 많은 도심에서 자전거를 탄다고 생각하면 여지없이 불의의 사고가 걱정된다. 타고나기를 운동 신경이 둔하게 태어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유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런 걱정과 불신이 무의미하다. 거리에 차가 많지 않고, 걷는 사람은 더욱 없다. 그래서 마음 편히 자전거를, 그러니까 이 자존호를 탈 수 있게 된 것이다.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자존호를 타고 마음껏 달린다. 아쉬운 기분이 들지 않고, 무리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내가 꼭 달리고 싶은 만큼.


오늘은 집에서 3km 정도 떨어진 구 이케다 씨 정원(旧池田氏庭園)까지 다녀왔다. 일찍부터 계획했던 일은 아니고,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맑은 하늘이 기다리고 있기에 급하게 결정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꼭 필요한 짐만을 단출하게 챙겨 집을 나섰다. 찻길을 따라 논길을 따라, 휴대폰 내비게이션 어플이 일러주는 대로 얼마간 얌전히 달리다 돌연 방향을 틀었다. 유월 초순의 대지를 다사하게 감싸 안는 햇살이, 미풍에 선들거리는 풀싹과 들꽃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봄노래가 너무 좋아서.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달리던 그 순간에 마주한 정복(淨福)을 조금 더 오래 느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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