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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 솔 Aug 28. 2021

사쿠라의 소원

Jul 7, 2016

칠석(七夕)이란 말을 들으면, 어릴 적 집 앞마당에서 올려다보던 은하수가 떠오른다. 밤을 밝힐 불빛이 많지 않은 시골 마을에는 어둠이 내리면 자주 별들의 강이 흘렀다. 옛날이야기에 깊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던 어린 시절의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반짝이는 별빛의 끝 어딘가에 서로를 그리워하는 견우와 직녀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달에서는 토끼가 열심히 방아를 찧고 있을 거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로만 남았지만, 일본에는 여전히 ‘다나바타(七夕)’를 기념하는 풍속이 남아 있다. 음력을 따지는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양력 7월 7일을 기념하고, 단자쿠(短冊)라 불리는 가늘고 긴 종이에 소원을 써서 조릿대에 매다는 고유한 풍습도 이어져 오고 있다. 다나바타가 가까워지면 거리 곳곳에는 단자쿠를 매달아 놓은 소원 나무가 놓인다. 내가 비는 소원만큼이나 남이 비는 소원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이때가 되면 소원 나무 아래서 종종 시간을 보낸다.


지난달 H보육원으로부터 다나바타에 맞춰, 한국 문화를 소개해줬으면 한다는 강좌 의뢰가 왔다. 아이들은 집중력이 오래가지 않으니 강좌는 짧게 하고, 이후 단자쿠를 만들거나 장식을 꾸미는 일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우리 옷만 한 것이 없어서 한복을 차려 입고 갔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고맙게도 ‘오리히메(織姫・직녀)’가 왔다며 반겨주었다. 한국에서 온 가짜 오리히메는 답례로 아이들의 이름을 한글로 적어 주었다.


여섯 살 사쿠라는 한글로 적힌 자신의 이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사쿠라는 내가 직녀성이 아니라 한국에서 왔다는 걸 알았다. 할머니가 한류 드라마를 즐겨 보기 때문에, 한국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우리가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라는 것도, 내가 자신보다 키가 두 배는 더 큰 어른이라는 것도,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것도 사쿠라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한국에서 온 가짜 오리히메가 마음에 든 사쿠라는 온종일 내 곁을 따라다녔다.


짧은 강좌가 끝나고 단자쿠에 소원을 적는 시간이 왔다. 나는 아이들이 적은 소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견우와 직녀가 행복하게 해 주세요.’, ‘엄마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줬으면 좋겠어요.’, ‘키가 크고 싶어요.’, ‘할머니가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과연 아이들 다운 소원이었다. 그때 누군가 곁에서 나를 툭툭 쳤다. 사쿠라였다. 사쿠라는 자신이 쓴 단자쿠를 내게 내밀었다. 내가 써준 한글 이름을 삐뚤빼뚤 따라 쓴 ‘사쿠라’라는 글자가 먼저 보였다. 이어서 사쿠라의 소원이 눈에 들어왔다.


사쿠라의 소원은 ‘선생님하고 또 놀 수 있으면 좋겠어요.’였다. 어릴 적 내 소원은 뭐였을까. 어쩌면 동네의 언니, 오빠들하고 내일도 또 놀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을지 모른다. 오늘 만나서 좋은 사람과 내일도 또 놀 수 있으면 좋겠다. 아, 이토록 멋진 소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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