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연민에 빠져 남탓만 하는 자에게 성장은 없다
1959년 11월 캔자스 홀컴에서 성실한 노력의 댓가로 부를 이루고 선량하고 무해하게 공통체의 이익을 위해 애썼던 한 가족은 두 명의 정신적으로취약한 이방인들에게 단지 50달러도 되지 않는 돈 때문에 살해당한다. 이에 대해 6년간 직접 인터뷰하거나 공식적인 자료를 수집해 1965년 뉴요커에 특집 기사로 4회로 분재되 실린 이 작품으로 트르먼 커포티는 논픽션소설이라는 장르를 확립하여 신저널리즘의 대표자가 된다.
자료의 수집 방식이 잘못되었다거나, 범인이나 형사에 대한 평가가 편향되었다는 비판을 받지만, 자료를 수집해 글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저자의 편견이 철저히 배제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충분히 객관적인 관점으로 이 비극적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심리와 배경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범죄의 기저를 파헤치는 사회 악의 실체와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 간명하고 쉬운 문체임에도 빨리 읽히지 않았다.
이 사건은 평화로워보이는 사회가 순간의 악의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보여주기 때문에 소름끼친다. 나는 사실 허접한 계획하에 일가족을 충동적으로 살해한 범죄자보다, 사건 발생 후 이웃을 서로 의심하다가 결국 마을과 전혀 상관 없는이방인이 범인으로 밝혀지자 그 뒤에 배후가 있을것이라고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들에 더 큰 혐오감을 느꼈다. 음모론의기저에는 ‘피해자에게 살해당할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래야 그런 불행한 일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겠지’라는 안정감을 통해 불안감을 없애고픈 이기적인 욕구가 있다. 또한 살인의 잔혹함을 비판하면서 사형을 찬성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보면서 이런 위선이 나에게 없다고 확신할수 없었기 때문인것 같다.
한편 범죄를 주도한 닉은 반사회성 인격장애가 있는데다가 두부 외상으로 인한 뇌손상으로 충동조절의 어려움이 악화되어 허접한 범죄를 주도한다. 여기에 누군가에게라도, 설령 그것이 자신이 혐오하는 소아성애성향을 가진 감방 동기이더라도, 지독히 인정받고 싶었던 외로운 편집성 조현병 환자 페리는 충동적으로 살인에 가담한다.
그러나 어린시절부터 제대로된 교육은 커녕 부모로부터 학대받고 애정결핍 상태로 성장한 모든 사람들이 범죄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 두 범죄자를 비롯하여 소위 ‘공감 능력이 없다‘며, 마치 ’취약한 환자‘로 범주화되는 범죄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면서 동시에 타인이 가진 것을 과소평가하는 교만함, 자기 연민에 빠져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무시하는 게으름을 갖고 있다. ‘내가 제대로된 가정에서 너처럼 풍족한 지원을 받고 자랐다면 나도 그걸 누렸을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을 가진 사람의 노력은 평가절하되고, 노력하지 않는 자신의 게으른 태도는 자기 연민으로 합리화된다. 이런 비겁한 평가절하와 합리화를 나는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정상인은 생각에서 끝나지만, 남이 ‘쉽게’ 가진것을 나도 ‘쉽게’ 뺏고 싶은 욕구를 충동적으로 행동화하면 범죄를 일으키게된다. 그러나 쉽게 얻은 것은 언제나 쉽게 사라지고, 쉬운 길을 아는 자는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한다. 노력 없이 과거에 얽매여 남탓만 하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은 고립된다. 세상에 쉬운 길은 없다. 성장은 고난의 길을 통한 자기 성찰과 노력을 수반한다.
반면 우연히 범죄의 대상이 된 클리터 가족은 자신이 가진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고, 실패의 시간도 묵묵히 견뎌내 10년의 성실한 노동으로 지역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이들이 삶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공교롭게도범죄자들의 특성과 반대된다. 안타깝게도 비극적인 범죄로 고통스러운 죽임을 당했지만, 비극은 그 사람의 됨됨이와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결국 타인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각자의 삶의 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타인을 안스럽게 여기며 조금 더 친절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 중요한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