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법
작가는 아직 그 뜻을 파악하기에는 어리고 연약한 고작 7살일 때, 아버지로부터 “삶에 의미가 없다, 너는 개미보다 우월하지도 중요하지 않으니 너 좋을 대로 살아라”는 말을 듣는다. 그렇다면 왜 살아가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자살 충동을 안고 살아가면서, 불안이나 좌절을 극복하고 빛나는 사람을 선망한다. 과학 기자였던 작가는 희망이 필요한 시기에 우연히 삶의 혼돈에 굴복하지 않은 생물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자신에게 어떤 답을 주길 바라며 그의 삶을 추적하지만, 그의 인간적 결함만 발견하고 실망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국 자기 나름의 삶에 대한 확신을 찾는 철학적 인문 에세이다.
생물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방지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부정적 정보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반만 채워져 있는 물을 보고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물이 반이나 있네!”라고 사고하는 사람보다 더 빨리 위기에 대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약간 우울한 시점을 가진 사람이 긍정적인 시점을 가진 사람보다 위기 대처가 더 빠를 수 있어 생명 유지의 차원에서 볼 때는 더 “현실적”이다. 하지만 삶을 그저 유지하는 게 본능이 아닌, 그냥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삶, 양질의 삶을 넘어서 “성공한 삶”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약간의 긍정적 왜곡은 개인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극복 혹은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예상되어 목표를 포기하는 사람보다 어떤 거시적인 목표를 달성할 확률이 높아진다. 낙천성으로 무장해 연이은 성공이 반복되면 “운명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라는 지나친 자기 확신과 단호함을 얻게 된다.
불행이 예측불가능하게 올 수 있듯 행운도 예측불가능하게 온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젊은 나이에 좋은 교수 자리를 얻고, 초대 스탠퍼드 대학교 총장까지 된다. 연이은 성공의 기저에는 그의 노력도 있었지만 분명 우연한 행운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행운조차 자신의 능력이라 여기고, 낙천성의 방패로 무장하여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자기기만을 강화시킨다.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 신화를 지나치게 신봉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과가 만들어낸 결과론적 신화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감동했던 그의 좌절인내력의 기저에는 사실 지나친 자기 확신과 낙천성이 있었다. 생물에 위계가 있다는 기본 신념을 갖고 어류를 분류했던 그의 사고는 인류에도 위계가 있다는 사고로 확산되어, 우생학을 미국에 들여와 나치보다 먼저 “부적합한” 인류 말살을 시작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생명의 적합/부적합의 기준을 누가 정할 수 있을까? 우생학의 기준으로 부적합한 인류가 말살되고, 그 당시 평가 기준으로 “적합한” 인류만 남아있다가 코로나19가 발생했는데 남아있던 인류가 해당 바이러스에 취약했다면? 인류는 말살되었을 것이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의 모든 장에서 다양성을 칭송하며 자연에 간섭하지 말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가장 강하거나 똑똑한 개체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가장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으며, 환경의 적합성은 시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야말로 혼돈이다. 이 때문에 다양할수록 종이 오래 유지되어 살아남는다. 위험한 것은 인간의 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이며 자연의 복잡성을 이해하거나 예상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이라며, 인간의 눈에 불쾌하게 보일 수 있는 특징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계에 이로울 수 있고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르고, 얕잡아본 사람이 나를 살릴 수도 있다.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언제 어떻게 빛날지 모르는 각자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어떤 답을 구하고자 추적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사실은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고 천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장수하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를 느끼지만, 그가 학자로서 평생을 바쳐 연구한 어류가 사실은 진화적 범주가 아니라는 사실이 현대 분류학자에 의해 밝혀진 것에 작게나마 위안을 받는다. 지구의 70%가 물인데, 물속에 산다고 다 어류라고 하는 것은 육지에 사는 사람과 개미도 하나의 종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자연 위에서 사람이 만드는 기준이 얼마나 편협하고, 오류 가능성이 있는지, 인간이 자연 위에 그은 선의 너머에 어떤 진실이 있는지 모른다. 임의로 정한 어떤 의미나 사실 혹은 기준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의미 없는 것인지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변화에 적응해야 성장할 수 있다. 결국 언제나 우월하거나 모든 측면에서 완벽한 인간은 없다는 것과 누구든지 살아가는 동안에는 혼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답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옳았다. 고작 7세 때 아버지로부터 얻은 삶에 대한 냉혹한 사실은 그녀에게 불안감만 키워줬고,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점이 돼서야 깨닫게 되었다. 선행 학습이 이렇게나 위험하고 부질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혼돈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가는 동안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도, 얻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파괴나 상실과 마찬가지로 혼돈이 주는 일부이기 때문이다. 혼돈과 공존하며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등 스펙트럼의 긍정적인 차원을 향해 나아간다. 요령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란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