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사랑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의 양면성
여섯 살에 어머니가 자살하고, 아버지도 떠난 후 할머니 집에 맡겨진 12살 진희는 “삶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앞에 일어나는 일과 자신의 주변 사람을 객관적인 시점으로 관찰한다. 12살에 이미 사고의 성장을 마친 진희의 시점을 통해 삶과 사랑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인 통찰력이 세밀하고 아름답게 표현되어 장작 44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인 것이 무색하게 술술 잘 읽힌다.
공감 능력은 기질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후천적으로도 학습이 가능하며 인간이 사회적으로 잘 기능하기 위한 필수적인 능력이다. 선천적으로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조차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애정을 받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에 타인과 문제없이 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감정적인 동물인데, 자신의 감정만 앞세우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 사고가 필요한 것 같다. 진희는 선천적으로 감수성이 매우 뛰어난 아이지만, 감정에 압도되어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한 엄마, 그런 자신을 떠난 아버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긴 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는 것이 주된 할머니의 조건부적 사랑(이라는 자신의 주관적 지각), 자신을 가여운 아이로 여기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동요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분리시켜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새의 관점으로 조망하듯 바라본 후 과도하게 통제한다.
부적절한 수준의 극단적인 부정적 정서-예를 들어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분노감이나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이라면야 이러한 기술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중화시키거나 통제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지만, 진희는 인간이 삶을 살면서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중요한 감정 경험을 있는 그대로 누려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통제하고 주지화한다. 이렇듯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가 훈련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는 삶을 살다 보면, 해결되지 못한 애정욕구는 누적되고, 만성적인 공허감이 쌓여 결국에는 사람과 삶을 대하는 태도가 냉소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불교에서 인간이 만물의 진실을 깨달았음을 표현하는 근원적인 지혜인 반야와는 달리 냉소적인 태도를 가진 개인은 끝없는 긴장 속에서 냉철하고 성실하게 고독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성적인 태도는 내가 삶을 살면서 경험하게 될 혼돈에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지만, 내가 삶을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하고 중요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능력도 빼앗아간다. 인간의 뇌는 생물학적으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요소를 감지하는데 예민하게 진화되어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렇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차원을 보는 능력은 인지적으로 더 많은 에너지와 능력을 요구하는 고기능이다. 삶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있고,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나쁜 사람을 만날 수도, 사랑받을 수도 배신당할 수도 있다. 운명이라고 불리지만 대부분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 경험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극단적으로 중화시키며 냉소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경험 자체가 나에게 주는 감정 경험을 충분히 누린 이후 “삶이 내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깨달음을 갖는다면 냉소적이지 않을 수 있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보다 풍부하게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