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유효기간
24세의 프랑수아즈 사강이 발표한 소설로 보통은 난해하고 모호한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의 덧없음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남녀 사이에서 불거지는 열정 속에 포함된 다양하고 미묘하며 양가적인 감정, 그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혼란, 그 혼란 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우연에 의탁해 충동적으로 행동해 버리고, 그 행동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감정은 각각 인물의 성별과 나이, 경험으로 형성된 다양한 해석의 틀을 통해 이해되어 사랑을 대하는 각각의 인물의 복잡한 심리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읽으면서 인물들의 행동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감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 행복해지고자 25살에 남편과 이혼했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나브로 아가씨에서 아줌마의 대열로 마지못해 넘어가고 있는 39살이 되어버린 폴은 불안정한 무기력증에 빠져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로제와 헤어지지 못하고 고독 속에 살고 있다. 그녀는 구속을 싫어하는 자신의 연인에게 악착스럽고 독점욕 강한 여자처럼 보이기 싫어 로제의 자유연애를 묵인해 주고 놀라울 정도의 이해심을 보여주면서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여긴다. 이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스스로를 늙었다고 여기며 더 이상 주도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설 용기의 상실 그리고 6년의 시간 동안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희망을 포기하고, 행복을 자존심과 맞바꾸고 버티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그녀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자기 인생하나 책임지기도 힘든 이 세상 속에서 내가 연인의 주인이 되는 것, 내 연인의 유일한 행복의 통로가 되는 것, 나를 통해 내 연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느낀다는 것은 감동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거북하고 불편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지워준다. 타인의 사랑을 받음을 통해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정립되었다면 그것은 진짜 내가 아니고 우리라는 관계에서 파생된 나의 일부분이다. 관계를 포기한다고 나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며 경험을 통해 성장한 나와 추억이 남는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감은 연인과 상관없이 개인 일평생의 독특한 삶의 경험과 가치관으로 형성하는 것이고 그것이 그 사람의 개성이 되어 타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6년이든 10년이든 답보상태의 연애를 끝내도 내 인생은 계속되고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행복할 수 있다. 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며 시몽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묻자 폴은 그제야 자신의 집중력이 직업과 늘 부재중인 로제에게 쏠려있었고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강이 제목 뒤에 문장 부호는 물음표가 아닌 점 세 개로 이루어진 말줄임표로 끝나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독자에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자각하는 것, 결코 자아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랑의 영원성이 아닌 덧없음을 강조하는 사강은 자신이 믿는 것은 열정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사랑이라 봤자 2-3년 이상 안 간다고 말한다. 그렇다 열정에는 분명 유효기간이 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 연인을 사랑하고, 나와 내 연인이 ‘사랑하는 우리’라는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기로 동의하여, 서로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어느 정도의 포기하는 희생과 노력을 기울인다면 열정은 ‘우리의 사랑’이라는 두 사람의 지속적인 노력과 애정을 통해 유지될 수 있다.
인간의 자원은 한정적이어서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노력하며 관계를 유지하다 보면 노력하는 사람의 자원은 고갈되기 마련이고, 결국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느라 정작 자신을 잃어버린 연인을 보면서 그동안 책임을 회피하여 누적된 자신의 책임감으로부터 도망치고, 자유를 갈망하며 연인에게 상처를 주는 수동공격행동을 하면서 암묵적으로 버림받기를 소망한다. 관계를 유지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악에 받쳐 공격하고 결국 서로 상처 주고 상처받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노력하는 사람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도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부여한 어떤 무의미한 가치만 맹목적으로 붙들고 있을 뿐이다.
열정으로 형성된 연인 관계에서 쿨한 관계라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연인에게 절대적인 열정의 유일한 대상이 되기를 정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나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는 착취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연인의 사랑을 통해 나라는 정체감을 형성하려고 하는 것, 다시 말해 내 인생의 주도권을 연인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인간은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자신 몫의 삶을 살아 내면서 빚어낸 자신이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면 ‘우리’라는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쌍방의 지속적인 노력을 할 것인지, 일시적인 열정을 즐기면서 자유롭지만 소모적인 관계를 가질 것인지 상호협의하에 사랑의 유효기간을 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