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족쇄가 될 때
내년이면 벌써 임상에서 일한 지 1N년 차가 된다. 여러 충격적인 사례들이 있었지만, 초기에 만난 젊은 여자 환자가 아직도 강렬히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나와 비슷한 20대 후반이었던 그녀는 첫 아이 출산 도중 발생한 뇌출혈로 반신마비에 언어 장애가 생긴 환자였다. 발병 후 남편은 협의 이혼을 요구하며 위자료로 함께 살던 집을 그녀에게 주기로 약속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혼이 성립되자 약속한 집을 아내 몰래 매각 후 잠적하여 그녀는 큰 충격받고 식음을 전폐하여 우리 병원에 실려와 나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내 앞에 앉아있던 그녀의 허망한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마비된 손등 위로 떨어진 그 장면은 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는 그 남편을 악마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손등에 떨어진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장기간 만성질환 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만나면서 그 남편의 심정이 이해가 됐다. 만성 질환으로 인해 신체 기능은 점점 더 쇄약해지고, 결국 대소변 가리기와 같은 기본적인 것도 타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면 환자는 쉽게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장기간 누적된 욕구불만으로 환자의 눈은 분노로 가득 차있고 흔히 그 분노의 화살은 가장 가까운 가족을 향한다. 환자보다 신체적으로 조금 더 건강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간병하느라 심신이 지쳐버린 보호자의 공허한 눈동자를 너무 많이 봤다. 이런 것들을 오랜 시간보다 보니 어쩌면 둘이 함께 죽어나가느니 나라도 살겠다고 빠르게 도망친 그는 적어도 자기 하나의 삶을 보호한 용기 있는 선택을 한 사람이었다.
이선 프롬은 순수의 시대로 미국 최초로 퓰리처 상을 수상한 여성 작가인 이디스 워튼의 중편 소설로 고독과 억눌린 욕망,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사회적 제약과 인간의 복잡한 감정 사이에서 고뇌하는 개인의 내면을 시적이고 예리하게 묘사한다.
부모님의 병이 깊어지자 대학 공부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선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연이어 병이 깊어진 어머니 간병을 돕기 위해 집에 온 사촌 누나 지나 덕분에 숨통이 트인다. 어머니마저 사망하고 홀로 남겨진 이선은 떠나려는 지나를 붙잡아 결혼한다. 그때 그들의 감정도 분명 사랑의 한 형태였으나 새로운 도시에서의 삶이 좌절되면서 지나도 병을 얻게 되고 결국 7년째 사랑 없이 책임감만으로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오갈 곳 없어진 지나의 사촌 동생인 젊음의 생기가 넘치는 매티가 그들의 삶에 들어오고, 이선은 그녀를 통해 내면의 욕망을 자각하게 된다. 그녀를 향한 열정은 점점 커지지만 가난한 농부인 자신의 현실적인 상태와 도덕적 윤리의 무게에 짓눌려 이도 저도 못하고 결국 충동적인 행동이 일으킨 비참한 결과를 묵묵히 지고 ‘낡은 폐선’처럼 죽은 자보다 못한 삶을 살아낸다.
어머니 간병과 사회적 고립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준 지나를 향한 이선의 존경, 이선을 향한 모성애를 느낀 지나, 자유와 젊음을 상징하는 매티를 향한 이선의 열정, 오갈 곳 없던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는 이선을 향한 매티의 애정 모두 다양한 모양으로 표상된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소중하게 찾아낸 사랑을 제대로 유지하지도 못했고,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데도 실패했다. 어떤 유형이든 감정은 일시적이고, 삶은 지속되며, 삶은 구질구질한 현실이다. 현실적인 삶의 무게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사라지면, 그들의 관계에는 의무와 책임만 남는다. 그리고 누구 하나가 자기 몫을 해내지 못하면 다른 이의 짐이자 족쇄가 되어버린다.
족쇄를 끊고 내면의 욕망을 따라 내 삶을 새롭게 시작하려면 도덕적 비판은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고 해도 유지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파국적 결말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족쇄를 끊지 못하겠다면,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그냥 내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정말로 다시 사랑하면, 잃어버린 사랑을 소생시킨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도저히 어렵다면 ‘사랑한다’고 자기 최면과 정신승리를 하며 버틸 수밖에 없다. 사회가 허용하는 선에서 소소한 즐거움으로 억압된 욕구를 조금이라도 해소하면서…
싸우거나 혹은 도망쳐야 한다. 이도 저도 못하면 ‘낡은 폐선’처럼 죽은 자보다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