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호선 청담대교에서
매일 7호선을 타고 청담대교로 한강을 건넙니다. 지하에서 달리던 전철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 지상으로 나올 때 아침과 밤은 확연하게 다릅니다.
아침. 눈부신 햇빛이 까만 전철 창으로 갑작스레 들어오면 눈을 감습니다. 2, 3초 흘렀을까, 눈을 떠 바라보는 건너편 창밖의 서울은 낯섭니다. 기껏해야 30분 전까지도 지상에서 걷다가 지하로 내려왔을 뿐인데, 전철에서 보는 지상의 세상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옆 자리에 사람이 없으면 고개를 돌려 뒷편의 서울 풍경도 잠깐 봅니다. 매일 보는 풍경에 특별할 게 없을 텐데, 그래도 그렇게 힐끗 볼 수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합니다.
밤. 퇴근할 땐 강북에서 강남으로 향하는 전철을 탑니다. 아침에 달렸던 청담대교로 다시 한강을 건너는 건데, 아침에는 느끼기 쉽지 않은 재밌는 구간이 있습니다. 청담대교 남단에 다다를 즈음 마치 놀이기구를 타듯 전철이 오른쪽으로 살짝 돕니다. 그 시간은 짧고 변화는 미세합니다. 어느 날 창밖의 불빛이 흘러가면서 평면으로도 회전하는 걸 보고 처음 알았는데, 이제는 눈을 감으면 회전이 몸으로 느껴집니다. 전철이 청담대교에 들어서면, 보던 책을 내려놓고 건너편 창을 유심히 살피며 그 순간을 즐깁니다. 가끔은 전철 안을 둘러도 봅니다. 나처럼 이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어릴 적 엄마는 김치를 담글 때면 간을 보라며 저를 찾았습니다. 요리를 한 당신보다 입맛이 객관적일 거라 생각했고, 시간이 흘러서는 집안에서 제 입맛이 예민한 편이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입맛만은 아니었습니다. 담배를 피기 전에는 담배 연기 냄새로 다름을 구분했고, 니트의 짜임새만으로 옷의 가격대를 얼추 맞췄습니다. 일을 할 땐 앱의 아이콘이나 버튼의 이미지가 이상하다 싶어 모니터에 띄워 확대해 보면 1픽셀이 어긋나 있었습니다. 화장품을 바꾸거나 달라진 아이라인 색마저 단번에 알았고, 누군가 기침하는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서 집중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세상 싫어하는 게 껌 씹는 소리일 정도니.
미세한 차이를 인지할 수 있어 가끔은 어떤 재미를 홀로 즐기기도 하지만, 이런 저런 입력이 많아 피곤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곁에 있는 사람이 겪는 불편이 더 컸을 겁니다. 특히 그 예민함은 사물을 넘어 관계로까지 확장되니 더욱 그렇습니다. 상대의 감정을 미리 알아채고 외려 그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니, 급변하는 저의 감정 상태가 힘들었을 겁니다. 문제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 예민함을 발휘하지 못해, 관계는 살얼음판처럼 순식간에 깨지기 일쑤입니다.
무던해지려 노력합니다. 예민함을 무디게 할 수는 없을 테고, 신경질적이고 까다롭고 짜증으로 치닫는 걸 죄다 예민한 감정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것에서 비롯되는 적잖은 감정을 추스르려 합니다. 표피가 예민한 선인장이 곁을 주지 않고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두는 처지가 남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