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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otrekker Dec 24. 2015

천상의 화원, 프라토 피아자

돌로미테 트레킹 2일


[트레킹 2일: 3시간]

치마반체 고개 → 피아자 산장  (→ 발란드로 산장 → 스피치에 봉 → 피아자 산장)


코르티나 담페초에 도착한 날 오후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코르티나 담페초는 1956년 동계 올림픽이 열린 작은 도시로, 겨울이면 스키 인파로 버글버글하단다. 트레킹 시즌 초입인지라 한산한 동네를 여유롭게 거닐 수 있었다.


코르티나 담페초는 첨봉이 도시 전체를 장막Cortina처럼 둘러싸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개를 들어 어디를 보아도 눈이 채 녹지 않은 2,000~3,000m급 산이 들어온다. 6월 말이라고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외투를 입어야 한다. 이곳의 건물은 주로 갈색과 흰색이며 보통 5층 정도다. 높은 데서 내려다 보면 아기자기한 게 귀여워, 장막처럼 둘러싼 산군에 포근하게 내려앉은 모양새다. 도시에 건물을 새로 지을 때는 지켜야 할 규정도 있다고 한다.


공항에서 외국인용 유심을 구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마치 작은 전파상과 같은 곳에서 유심을 샀는데, 문을 늦게 열고 일찍 닫는 바람에 몇 번이나 헛걸음을 하기도 했다. 산악 도시라 중심가에는 아웃도어 관련한 매장이 많은 편이며 큰 마켓도 있어 장을 볼 수 있다.


도시의 중앙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서는 큰 도시는 물론 돌로미테 곳곳으로 버스가 다닌다. 트레킹 첫째날 아론조 산장으로 가는 버스도 이곳에서 출발했다. 도시가 작아서인지 아쉽게도 예매 같은 건 안 된다(아쉽다는 건 다시 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트레킹 이튿날 일정도 버스 터미널에서 시작이다.


코르티나 담페초 버스터미널. 도시 중앙에 있다 보니 이곳 옆엔 장이 열린다.


치마반체 고개. 이곳에서 3박 4일 트레킹을 시작한다.


약 20분 정도 버스를 탔을까, 치마반체 고개Passo di Cima Banche에서 내린다. 3박 4일 트레킹을 시작하는 곳이다. 사방으로는 치솟은 암봉이 늘어서 있다. 아침까지 구름으로 덮였던 하늘은 우리를 반기기라도 하듯 파랗게 열린다. 시야도 깨끗해지면서 풍광이 맑게 다가온다. 지금이라도 어제 보지 못한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를 보러 가고 싶어 진다. 일행은 함박웃음에, 돌아보는 시선도 땅을 밟는 걸음도 들떠 있다.


치마반체 고개에서 바라보았으니, 크로다 로사의 남쪽 어딘가의 모습일 것이다.


등 뒤로 크리스탈로 산군이 하얗게 빛난다.


숙소이자 목적지는 2시간 정도 걸리는 피아자 산장Albergo Prato Piazza이다. 크로다 로사 산군Croda Rossa을 왼편에 두고 계곡을 따라 오른다. 뒤로는 눈 덮인 크리스탈로 산군Cristallo이 웅장하다.



이곳 트레일의 길 안내 표지판은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를 병기하며, 오스트리아 국기 문양을 사용한다. 티롤 지역에 속하기 때문인 듯하다. 표지판에는 소요 시간도 적혀 있는데, 이를 보고 일정을 세워서는 안 된다. 표지판에 적힌 시간은 산악구조대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표지판 시간에 1.5배 정도로 계산해야 한다.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걸 보면, 이곳은 농가가 아닐까 싶다. 이런 곳에서 산다는 건...


평탄한 길을 걷다 20분 정도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방금까지도 흰 바위 투성이 계곡이었는데 갑자기 푸른 초원이 펼쳐진다. 프라토 피아자Prato Piazza다. 초원 광장이라는 뜻인데, 이발소 달력에서 볼 법한 장관이다. 야생화가 피어 있는 푸른 초원 끝엔 눈 쌓인 봉우리가 있는, 뭐 그런 사진. 나란 존재가 이곳에 있다는 게 어색하다. 돌로미테의 선자령이라고 해야 할까. 이곳은 해발 2,000m다.






눈으로만 담기에는 아까운 듯, 사진 찍기에 바쁘다. 일행 중 한 분은 삼각대까지 편다. 이곳에 어렵게 온 사람들일수록 셔터 누르는 횟수는 많다. 아니 그렇겠나, 나 역시 또 언제 설산과 야생화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을 올 수 있을까.

전날도 느꼈지만 이곳 풍광에는 거리감이 없다. 도무지 높이와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숙소인 피아자 산장 뒤로 솟은 산을 보며 저기 가보면 좋겠다고 하니, 왕복 5~6시간은 걸릴 거라 한다. 산장 의자에 앉아 지도를 펴보니 해발 2,839m 봉우리Picco di Vallandro다. 하기야 산장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크로다 로사는 해발 3,146m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광활한 대지에 솟은 바위 봉우리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산맥이 아니라 산군이라는 표현도 이곳에 와서 처음 들었다.


피아자 산장 바로 앞에 크로다 로사가 버티고 있다. 낮아 보이지만 해발 3,146m다.



피아자 산장은 웬만한 여관과 견줄 만하다. 그러고 보니 지도에는 다른 산장과 다르게 피아자 산장의 이름에 Rifugio피난처 대신 Albergo여관이라 적혀있다. 식사와 차는 기본이고 방마다 화장실이 있다. 6월 말인데도 화장실에는 뜨거운 물이 나온다. 산장에서 10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버스 종점이 있으며, 산장 옆에는 무려 호텔이 있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여행한다면 꼭 한 번 이곳에서 하룻밤 머무는 걸 추천한다.


점심 식사 후 오후 일정은 발란드로 산장Rifugio Vallandro을 지나 스피치에 봉Monte Specie까지 다녀오는 약 3시간 코스다. 안타깝게도 가지 않는다. 천둥소리와 조금씩 내리는 비는 문제 될 게 없지만, 검사받은 무릎이 이상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오늘 반나절은 아이싱을 하면서 쉬어야 남은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일행 중 나이도 제일 어린 게 무릎 아프다고 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홀로 산장 앞 벤치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쓴다. 한 문장 적고 고개를 들면 크로다 로사가 쳐다보고 있고, 한 문장 적고 고개를 돌리면 프라토 피아자가 펼쳐져 있다. 설정이라 해도 이처럼 편지 쓰기에 멋진 장소는 없을 게다. 날은 꽤 쌀쌀한데 그마저 좋다.


편지를 쓰고 산장 주변을 돌아봤다. 드넓은 초지에는 방목하는 소가 상당하다. 워낭소리가 사방에서 일정하게 들리는 게 마치 프라토 피아자의 효과음 같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곳이다.


석양이 반사되어 빛나는 크리스탈로



석양에 더욱 붉게 보이는 크로다 로사


크로다 로사는 붉은 벽이라는 뜻인데, 산장에서는 군데군데  붉은색이 보인다. 물론 가까이에서 보면 굉장히 넓은 면적이겠지만 이름값을 하기엔 부족하지 않나 싶다. 이런 나를 의식이라도 한 듯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니, 석양빛을 빌려 크로다 로사가 붉게 물들었다. 남쪽으로는 크리스탈로 산군 역시 이름처럼 투명하게 빛난다. 멋진 일몰이지만 설악산 소청에서 바라보는 일몰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는, 괜한 자존심을 세워 본다.


가이드는 새벽에 일어나면 반대편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빛이 반사된 크로다 로사가 볼만 하다고 했는데, 새벽에 일어나지 못했다. 일행 중 한 분이 일찍 일어났는데 구름이 깔려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곳은 서울보다 위도가 9도 정도 높아서 해가 늦게 진다. 아래 사진의 메타 정보를 보니 밤 9~10시 사이다. 그럼 아침 햇살이 비친 크로다 로사를 보려면 새벽 4시에는 일어났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푹 자길 잘했다.




밤 10시 산장에서 바라본 서쪽 하늘


내일은 저 앞에 보이는 크로다 로사의 허리를 휘어 감으며 뒤편으로 간다. 가이드는 내일 이번 트레킹 코스 중 가장 멋진 풍광을 볼 수 있을 거라며 기대감을 부풀린다. 술은 못 마시지만 와인을 마시는 일행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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