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랩소디 - 파트 2

단편소설

by 물개사랑

시간이 느려졌다. 얼굴의 혈관이 한꺼번에 열리는 느낌. 귀 끝에서 열이 올라왔다. 옆자리 남자가 펜을 떨어뜨렸다. 앞줄의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진행자가 잠깐 손가락으로 책장 모서리를 쳤다. 누군가가 기침을 했다. 누군가가 웃음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그 웃음은 웃음이 아니었다. 공기 속에서 방향을 잃고 진동했다.

“죄송합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그 말이 방 안의 소리를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지만, 고백 뒤의 몸은 이상하게 느슨해졌다. 긴장이 한 겹 벗겨지고, 다른 종류의 긴장이 그 자리를 채웠다. 부끄러움의 밀도는 생각보다 일정했지만, 그 일정함이 몸을 지탱하게 했다.


모임이 끝나고 모두가 천천히 흩어졌다. 문 앞에서 신발을 고쳐 신는 사람, 계산대에 책값을 내는 사람, 진행자와 악수를 나누는 사람. 나는 도망치듯 화장실로 가서 세면대에서 물을 받아 손을 적셨다. 차가운 물이 피부를 타고 올라오자 온몸의 열이 내려가는 듯했다. 거울 속 얼굴은 창백하고, 눈가에는 얇은 소금기가 말라 있었다. 종이 타월을 뽑아 물기를 닦는 동안, 종이가 손에 붙었다 떨어졌다.

“오늘, 덕분에……”

화장실을 나와 책방을 나가는데 진행자가 언제 왔는지 모르게 다가와 말했다. 그는 말끝을 흐리고, 대신 작은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안에는 민트향 캔디가 한 줌 들어 있었다.

“다음에 또 오세요.”

말을 마치며 살짝 웃었다. 웃음은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잠시 공간에 부드러운 자국을 남겼다.

‘구린 냄새 대신 민트라는 건가…….’

나는 책방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생각보다 강했다. 입간판이 가볍게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건너편 횡단보도에 사람들이 모였다. 신호등의 녹색 불이 깜빡였다. 발밑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배 속의 긴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큰 일은 지나갔지만, 잔압처럼 남은 것이 있었다. 몸은 알았다. 아직 집까지, 지하철 열 정거장이 남아 있음을.


코너를 돌아 지하철 입구로 내려갔다. 계단의 금속 손잡이가 차가웠다. 에스컬레이터 고무벨트에서 살짝 끈적함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피부에 묻은 그 미묘한 점성이 당황스럽게 현실적이었다. 개찰구를 통과하자, 플랫폼의 먼지바람이 터널에서 뿜어져 나왔다. 스크린도어 틈을 비집고 나온 그 바람이 바지 천을 흔들었다. 공기의 온도는 지상보다 낮았고, 소음은 지상보다 두꺼웠다.

전광판에 도착 열차의 시간이 표시되었다. 3분. 나는 기둥 옆으로 가서 등을 기댔다. 기둥의 차가움이 등뼈를 타고 올라왔다가, 어깨에서 둔하게 퍼졌다. 허리를 펴고, 무릎을 약간 굽히고, 발끝에 힘을 실었다. 안쪽의 압력이 또 올라왔다. 파동은 이제 작았지만, 파동은 언제든 배신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사람들 몸 냄새, 향수 냄새, 레일의 쇠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배 안쪽의 근육이 다시 울렁였다.

전철이 들어왔다. 웬일인지 전철 헤드라이트가 또렷이 보였다. 그 헤드라이트가 터널의 공기를 밀었다. 그리고 먼지도 밀어냈다. 그 소리와 바람이 겹치는 순간,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비장한 각오라도 한 걸까. 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정해진 틀 안에서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타고 내렸다. 나는 출입문에 등을 붙였다. 문 고무 패킹이 등에서 미세하게 눌렸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차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흔들리는 틈에 나는 내 안의 흔들림을 겹치려 했다. 전철이 선로 이음매를 지날 때마다 바퀴가 바닥을 치고, 그 소리가 차체를 타고 들어왔다. 그 리듬이 잠시 나의 안식처가 되었다.

나는 아주 조용히, 거의, 흔들림에 숨어서, 몸속의 압력을 풀었다. 소리는 바람과 금속음에 섞여 밀폐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코끝으로 가까운 듯 멀리서 향이 한 번 들어왔다 사라졌다. 누군가 핸드폰 화면을 스크롤하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귀에서 빼며 귓속을 문질렀다.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 얼굴을 보았다. 얼굴은 금속 표면처럼 무표정했다. 무표정한 얼굴 중 하나인 내 얼굴에서 미세한 떨림은 나만 안다.

그래, 바로 이거지. 이 속에서 조용히 하는 거지.

나는 다시 열차 리듬에 맞춰 기분 좋게 시도하였다. 이번엔 좀 더 과감하게, 속이 아주 편해지게 길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공이다!

하지만, 앗! 냄새가 왜 이래? 아까보다 훨씬 진하잖아?

그 순간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이게 무슨 냄새야?”

“썩은 달걀 냄새 아니야?”

“누가 똥 쌌나?”

“에휴, 죽겠네. 내려서 싸든가, 끼든가 하지.”

정확히 나를 겨냥해 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결국 내게 한 마디씩 한 거였다. 나도 내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숨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아…, 드럽게 독하네. 딴 사람들은 오죽하겠어…….’

내 속은 훨씬 편해졌지만, 내 속내는 몹시 불편해졌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단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람들이 벌게진 내 얼굴을 우연히라도 보지 않길 바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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