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슬픔을 나는 절반도 모를 텐데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문득 신형철 평론가의 책 제목이 떠오른다. 슬픔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곰곰이 따져 보면 이 슬픔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로부터 출발한 슬픔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슬픔은 밖에서 왔다. 타인으로부터. 그런데 왜 내 것이 아닌 슬픔 때문에 이렇게 하루하고도 반나절 이상을 허비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걸 허비라 하는 게 비윤리적으로 느껴져서 다시 슬프다.
외로운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외로운 사람을 바라보며 걱정하는 이가 있다. 걱정하는 이가 내게 연락을 했다. 이 외로운 사람을 지켜봐 달라고. 걱정이 된다고. 그 걱정하는 이의 불안이 내게 전이된 모양이다.
걱정하는 이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불안을 느끼고 있다. 계속 가슴이 벌렁거리며 뛰고 있는 게 느껴진다. 가만히 숨을 고를 때. 몸의 긴장을 풀 때. 나도 모르게 쥐고 있던 힘을 내려 놓을 때.
외로운 그이에게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과 내가 무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서로 얽혀서 용트림친다. 슬프다. 어쩌면 나는 지금 슬픔을 공부하느라 슬픔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아직 읽어 보지 않았다.
지금 나를 휘감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있는 이 타인의 슬픔은 언제 떠나갈 수 있을까. 떠나가기는 할까. 후련함을 느끼고 싶다.
어제부터 종일 답답한 이 숨이 비단 코감기 때문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너를 위해 나는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게 두렵고 어렵고 불편한 일이라 해도, 무릅쓰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나를 더 편하게 하겠지. 너를 돕는 일이 곧 나를 돕는 일이다.
정답은 없다. 오답도 없다. 노력과 진심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진심을 알아 주기를 바라면서 내가 정의라 생각하는 걸 실천해 볼 따름이다.
예정하고 있는 이 노력이 부디 너를, 또한 나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지킬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