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를 읽는데 윤하 노래가 생각난다고?

시 읽고 쓰는 글 - 김수영, <파밭 가에서>

by 이솔지




- 이 시를 곱씹다 보니, 즐겨 듣던 노래 <사건의 지평선>이 떠오릅니다. <파밭 가에서>의 새로운 변주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래서 함께 다루게 되었으니, 시와 노래를 연결해 더 즐겁게 읽고 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


- ‘시 읽고 쓰는 글’은 시를 읽은 후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쓴 글로, 형식이나 장르(시평, 에세이, 짧은 소설 등)도 매번 바뀝니다. ‘시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구나.’ 하고 재미로 보아 주세요. 또한 여러분이 시를 읽고 즐기는 데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 읽기​​



파밭 가에서​


김수영

​​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1959>

​​


#2 시 읽고 쓰기


‘얻는 것은 곧 잃는다는 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길 모퉁이’?

​​

붉은 파밭을 보며 서 있다. 모든 잎이 다 진 뒤, 붉은 흙만 남아 있는, 폐허와도 같은 파밭. 그러나 가만히 계속 들여다보면, 푸른 새싹이 보인다. 그때 마음이 동한다. 지금 무너지고 황폐해진 마음 역시 저 파밭과 같지 않은가 하고. 묵은 사랑을 잃고 힘들어하는 마음에, 사실 지금은 잃은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얻어가고 있는 중이야, 라고 자연이 속삭이는 듯하다.​​


묵은 사랑. 묵다는 말은 첫째, 일정한 때를 지나서 오래된 상태가 되었다는 뜻. 둘째, 밭이나 논 따위가 사용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는다는 뜻이다. 곧 묵은 사랑이란, 오래된 사랑, 이미 지나가 버린 상태의, 끝난 사랑. 그래서 사용되지 않고 방치된 밭이나 논처럼 더 이상 쓸모를 다하고 있지 않은 사랑이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노래하는 시가 있다. 이형기의 <낙화>다. 작년에 유행했던 노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에는 이런 가사도 나온다. ‘솔직히 두렵기도 하지만 노력은 우리에게 정답이 아니라서’라고. 뮤직비디오나 가사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노래는 이별의 상황에 놓인 연인들의 이야기다. 서로의 감정이나 인연은 이미 끝난 상태. 그걸 이어 보려 한다고 붙일 수는 없으니 서글프다. ​​​


그때 화를 내지 않았다면, 그때 다른 말을 했다면, 아니 아예 그날 만나지 않았다면, 처음처럼 계속 상대를 존중하고 조심스럽게 대했다면, 과 같은 후회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성찰. 그 속에서 감정은 냄비에서 끓고 있는 계란처럼 들끓고, 때로는 모두 재가 된 듯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이미 한 차례 성했다가 이제는 흙바닥만 남은 붉은 파밭처럼 고요하고, 쓸쓸하다. ​


오직 혼자만 남은 듯한 느낌. 그렇게 모두 잃은 것 같을 때 눈에 들어온 새싹에 화자는 위로를 받는다.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랑을 얻었을 때도 그러지 않았나. 사랑을 얻고 나서는 기존의 일상과 다른 삶을 살았다. ‘혼자’보다는 ‘같이’에 익숙해졌고, 상대에 맞추어 자신 역시 조금씩 변해 갔다. 해 보지 않았던 일들을 하기도 했지만, 주로 하던 일들에 등돌리기도 했다.

이별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관점을 달리해 보면, 지금 무언가를 얻고 있기에 사랑을 잃고 있다. 묵은 사랑이 곧 삶은 계란과 같다면, 그 껍질은 벗겨져야 알맹이가 나올 수 있다. 삶은 계란을 먹지 않고 방치한다면 썩고 말 테고, 그건 묵은 사랑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래, ‘솔직히 두렵기도 하지만’ 묵은 사랑을 벗어던져야 그 안에 있는 사랑의 ‘알맹이’도 만날 수 있다.

새싹이 아무리 푸르러도, 새파랗게 자란 파들이 무성한 파밭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붉은 파밭에서야 푸른 새싹이 눈에 띄는 것처럼, 사랑의 알맹이도 사랑이 한창일 때가 아닌 사랑이 떠나가는 지금 더 눈에 선명히 보일 수 있다. 그러니,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무언가 얻으려면 잃어야 한다. 삶은 계란을 얻으려면 껍질을 잃어야 하는 것처럼, 파밭의 푸른 새싹을 얻으려면 붉은 파밭은 지워져야 하는 것처럼. ‘더 나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묵은 사랑’도 잃어야 한다. 벗겨져야 한다. ‘너’도, 아니 ‘너의 그림자’에서도 이젠 벗어나야 한다. ​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의 대상인 ‘너’. 여전히 내 가슴에는 남아 있고, 기억이 나고, 그립다. 그러나 그게 진짜 ‘너’인가. 아니, 너의 ‘그림자’다. 다 묵어버린 사랑의 끝에 서서 추억하는 우리의 그림자, 기억, 추억일 뿐이다. 지금이 아닌 것. 지금은 쓸모를 잃고 한참 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앉은 거울처럼. 더 이상 내 얼굴을 선명히 비추지 못해,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가다듬을 수 없게 하는 오래된 거울 같은 우리의 사랑. 묵은 사랑의 껍질을 벗겨내기로 결심하니, 너의 그림자도 움직인다. 이제 내게서 떠나간다. 아니, 내가 보내는 것일까.

​​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너의 그림자와 함께 묵은 사랑도 움직인다.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본다. 너를 잃는다. 사랑을 잃는다. 그래도 ‘얻을 것’이 있다. 너를, 묵은 사랑을 잃고 얻어야 하는 무언가, 알맹이가, 푸른 새싹 같은 싱그러움이있다. 아니, 그것을 얻는 게 곧 잃는 것이다. 자신에게 다시 되뇐다. 묵은 사랑에 집착하지 말라. 한때 소중하고 중요했던 것이라도 잃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다시, 새로운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다. 더욱 시기 적절하고 필요한 것을. ​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파밭을 유독 붉었던 이유는 흙이 아직도 새벽 이슬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내린 아침 이슬의 물은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아, 흙이 젖어 그 색이 짙다. 붉을 정도로. 젖어 있는 상태란, 아직 그 물기가 남아있는 상태. 사라지지 않고, 흔적이 있는 상태. 묵은 사랑이 떠나가도 이와 같이 그 여운이 남을 테지.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 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너와 내 맘에 살아 숨쉴 테니.’라는 가사와도 같이. 지금은 먼지 쌓인 석경처럼 퇴색되었지만 빛나던 우리 이야기는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묵은 사랑도 젖어 있다. 남아 있다. 내 마음에. 어떤 마음?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이다. 어쨌든 지금은 이별의 순간. 무언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후회도 될 것이나 더 돌이킬 수는 없다. 그런데 그 뉘우침, 후회, 성찰은 값지다. 그런 내 마음은 깨달음이 있는 마음. 깨달은 마음이므로 푸른 새싹과 유사하다. 이 일이 있었기에 나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마음 한복판에 묵은 사랑이 젖어 있다. 묵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므로 다시 말한다.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며,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 모퉁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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