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고 쓰는 글 - 한용운, <거짓 이별>
‘시 읽고 쓰는 글’이라고요? 줄여서 ‘시글’!
- ‘시 읽고 쓰는 글’은 시를 읽은 후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씁니다.
- ‘자유롭게!’인 만큼, 형식이나 장르도 매번 바뀝니다. 시평이 될 수도, 에세이나 짧은 이야기, 혹은 모방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 보다 많은 분들이 시를 친숙하게 느끼고 즐기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쓰고 있습니다.
한용운
당신과 나와 이별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가령 우리가 좋을 대로 말하는 것과 같이 거짓 이별이라 할지라도 나의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거짓 이별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떠날 것인가요
한 해 두 해 가는 것이 얼마 아니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시들어가는 두 볼의 도화가 무정한 봄바람에 몇번이나 스쳐서 낙화가 될까요
회색이 되어가는 두 귀밑의 푸른 구름이 쪼이는 가을 볕에 얼마나 바래서 백설이 될까요
머리는 희어가도 마음은 붉어갑니다
피는 식어가도 눈물은 더워갑니다
사랑의 언덕엔 사태가 나도 희망의 바다엔 물결이 뛰놀아요
이른바 거짓 이별이 언제든지 우리에게서 떠날 줄만은 알아요
그러나 한 손으로 이별을 가지고 가는 날은 또 한 손으로 죽음을 가지고 와요
화자는 봄의 한복판에 서 있다. 봄바람이 불고 꽃이 핀다. 꽃이 만개할 때에 비로소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있다고 느낀다. 새 달력을 꺼낼 때나 바뀐 연도를 볼 때보다 더 명징한 감각으로 느낀다. 한 해 두 해가 가고 있다고. 겨울이 점차 사라지고 봄이 찾아들 때 눈도 코도 피부도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흰 목련, 연노란 산수유와 연분홍의 진달래, 샛노란 개나리와 빨갛기도 하고 하얗기도 한 철쭉. 풀 비린내. 가벼워진 외투. 그때 문득 떠오르는 말.
당신과 나와 이별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러고 보면 언제 이별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이때부터 이별이야’라고 명확히 선 긋지 않았으니까. 마치 계절이 바뀌듯 서서히 이별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어쩌면 이별이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별한 상태지만 우리가 이별이라고 정하지는 않았으니까 이별은 아니야. ‘거짓 이별’. 그렇게 우리는 우리 좋을 대로 상대를, 자신을 기만했다. 그러나 바뀐 계절의 모습처럼 명확한 사실이 하나 있다. 아직 꽃샘추위가 남아 목도리를 두르고 옷을 껴입더라도 복숭아꽃이 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사실. “나의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님의 침묵>에서 보이는 역설은 이 시에서도 유효하다. 눈에 보이는 상태는 이별이지만, 그 이별을 화자와 ‘당신’은 ‘거짓 이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입술이 닿지 못하는 현재의 상태가 ‘거짓’이라는 점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 둘의 입술이 다시 닿을 수 있게 된다는 전망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가. 바로 거짓 이별이 떠나갈 때다. 그래서 화자는 기다리고 있다. “이 거짓 이별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떠나갈 것인가요”라고 말하면서.
화자의 어조가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니, ‘당신’ 역시 화자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거짓 이별이 끝나면 견우와 직녀가 서로를 향해 오작교를 건너 오듯, 당신도 화자를 향해 올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한용운 시에서 ‘님의 도래’를 기다리는 모습은 <거짓 이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한 해 두 해 가는 것이 얼마 아니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 이별이 끝나려면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야 하는 걸까? 한 해, 두 해 지나는 것이 답답하다. 한순간에 세월이 훅 지나서 바로 이 거짓 이별이 끝나면 좋으련만, 세월은 더디게도 흐른다. 이제 겨우 두 해가 흘렀을 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게 얼마 안 된다고 투덜거릴 필요도 없다. 한 해가 지났을 때는 언제 또 한 해가 지나나 했는데, 지금 보니 벌써 두 해가 흘렀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니 결국 거짓 이별이 끝나는 순간도 언젠가는 찾아올 게 분명하다. 그동안 계속 화자는 ‘당신’에게 이 노래를 띄우면서 기다린다. 한 해 두 해쯤이 아니라, 아예 청춘이 지나 중년도 지나 노년이 찾아올 때까지라도. 당신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시들어가는 두 볼의 도화가 무정한 봄바람에 몇번이나 스쳐서 낙화가 될까요
화자는 알고 있다. 거짓 이별이라 해도, 우리가 결국 다시 만날 거라 해도, 그때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화자의 두 볼에 복숭아꽃 빛깔로 물들어 있던 생기는 이제 시들어가고 있다. 청춘, 젊음의 꽃다운 상징인 두 볼의 도화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거짓 이별은 끝날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묻는다. 내 두 볼의 도화가 몇번의 봄바람을 더 맞아야 아예 낙화가 되겠느냐고. 몇 해나 더 지나야 내 볼의 꽃이 완전히 지고, 이 시련도 끝나고, 당신을 만날 수 있겠느냐고.
화자는 또 알고 있다. 겨우 볼의 발그레함이 사라지는 정도로는 안 된다는 걸.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거짓 이별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푸른 구름처럼 싱싱한 귀밑의 머리카락들도 시들어야 할 테다. 새까맸던 귀밑머리가 이제는 점차 회색이 되어가고 있으나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아예 백설처럼 흰빛이 되어야 한다. 청춘의 봄과 여름, 중년의 가을, 그리고 노년의 겨울까지. 봄과 여름도 길었으나 여전히 가을도 길다. 가을 볕을 얼마나 더 쪼여야 회색의 머리카락이 아예 흰빛이 될 것인가. 아예 내가 죽기 직전은 아닐까. 아득한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한 해 두 해 가는 것이 얼마 아니된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화자는 언제 거짓 이별이 우리에게서 떠날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 실제로 언제 떠날지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점은 이 이별이 ‘거짓’이라는 것. 거짓 이별이 떠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나 힘들지만, 언젠가는 떠날 것임을 분명히 안다. 그날이 화자의 머리카락이 모조리 백발이 될 때이든, 병석에 누워 죽기를 기다리는 때이든, 혹은 아예 화자가 죽어 땅에 묻힌 때이든 간에. 화자가 죽은 후에도 언젠가 거짓 이별은 떠날 것이니, 화자의 기다림은 죽음 이후에까지 이어질 수 있다. 한 해 두 해, 결코 얼마 아니된다 할 수 없는 그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리운 것은 모두 님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에서 ‘그리운 것은 모두 님’이라고 말했으나, 사람들은 흔히 ‘님’을 독립으로 해석하고는 한다.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의 행적에 기반한 해석이다.
기다림이 정말 죽음 후에도 줄곧 이어져서일까.
1944년 6월, 한용운은 세상을 떠났지만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