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고 쓰는 글 - 진은영, <남아 있는 것들>
#1 시 읽기
남아 있는 것들
진은영
나에게는 끄적거린 시들이 남아 있고 그것들은 따듯하고 축축하고 별 볼 일 없을 테지만 내게는 반쯤 녹아버린 주석주전자가 남아 있고 술을 담을 순 없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퀭한 눈이 있고 그 속에 네가 있고 회색 담벼락에 머리를 짓이긴 붉은 페인트 붓처럼 희끗해진 머리카락을 헝클어놓은 네가 있고, 젖은 바지들의 돛, 아침의 기슭엔 면도한 얼굴로 말끔하게 희망이, 오후가 되면 거뭇거뭇 올라오는 수염 같은 절망이 남아 있고 또다시 아침, 부서질 마음의 선박과 원자로들이, 잘 묶인 매듭처럼 반드시 풀리는 나의 죽음이 남아 있고
#2 시 읽고 쓰기
이 세상엔 당신이 알지 못하는 다양한 시가 매일같이 태어난다.
사람들의 수첩에, 마음에, 심지어는 냅킨 조각에도 시가 남아 있다.
끄적끄적. 수업 시간에, 쉬는 시간에, 혹은 점심 시간에, 아무도 없는 회의실이나, 사람 가득한 사무실 한구석에서, 화장실에서,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순간이라든가, 마음에 그늘이 가득한 어느 날에 쓴 시들이. 그 시들은 시를 쓴 사람의 기억에서 잊힐지라도 계속 남아 있다. 시를 썼다는 그 사실이 남고, 시를 쓰며 풀었던 감정의 응어리가 남고, 시를 고민하던 시간이 흔적처럼 남는다.
사실 별 볼 일 없을지도 모른다.
등단한 사람이 쓴 시도 아닌 것들, 습작시라든가, 혹은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쓴 독백 같은 시들. 태어난 데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별 볼 일 없을지도 모른다. 돈이 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 시들은 따듯하다.
어느 날,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날에, 시를 써야만 했던 어느 사람의 가슴에서 풀려나온 감정을 담고 있기에 따듯하다. 시를 씀으로서만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시는 필연적으로 따듯하다. 그리고 축축하다.
축축하게 오래 늘어져 있다. 시를 쓴 기억이 남아서 시 쓴 사람을 적시고 있다. ‘나도 한때 시를 쓴 적이 있지.’라는 그 기억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오래된 감수성에 젖는 사람도 있다. 그 모든 사람들에게 시는 축축하게 붙어 있다. 젖은 종이처럼 달라붙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반쯤 녹은 주석주전자는 술을 담을 수 없다. 시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쓸모는 없다. 어쩌면 시와 마찬가지로 별 볼 일 없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특별한 용도가 없다는 점에서 끄적거린 시나 반쯤 녹은 주석주전자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내 퀭한 눈이 있다. 퀭한 눈이 응시하는 시선 끝에 그 별 볼 일 없지만 마음을 축축하게 하는, 이 마음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존재들이 있는 것이다.
너 역시 그런 존재다. 이 두 눈이 퀭한 것은 오래도록 바라보았기 때문일까. 여하간 지친 마음과 눈 속에는 끄적거린 시들처럼, 녹은 주석주전자처럼 네가 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단정하지 못하고 어딘가 소란스럽고 괴로워보이는 모습으로 네가 있다. 그런 너이기에 네 모습이 내 마음에 깊이 젖어 쉽게 떠나지 않는다.
젖은 바지들, 그러니까 화물선들에 걸린 돛을 바라본다. 그 돛 사이로 아침 해가 걸린다. 그때만큼은 조금, 희망이 떠오른다. 어쩌면 너도 괜찮아질지 몰라. 그리고 나도 괜찮아질지 모르고, 저 별 볼 일 없는 시도 의미가 있을지 모르고, 또 반쯤 녹은 주석주전자에게도 술 담는 일 외의 다른 용도가 있을지 모르지.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든가.
그러나 점차 오후가 되면, 햇살은 강해지고 정오가 되어 이 모든 세상을 비추고 나면, 눈 가리고 아웅 하던 절망이 남아 있는 게 보인다. 거뭇거뭇 올라오는 수염처럼, 절망이 점차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다시 해가 지고 절망의 시간이 오고, 그러다 다시 아침이 온다.
아침이 오면 또 조금의 희망이 떠오르지만, 결국 오후가 되면 다시금 부서지고 말 이 마음. 그런 마음의 선박과 원자로. 결국 남아 있는 것은 희망과 절망이 모두 남아 이글거리는 원자로다. 그 모든 것이 섞이고 얽혀 있으니 엉킨 실태래와 같을까. 그러나 잘 묶인 매듭처럼 풀릴 수 있다.
엉키지 않은, 잘 묶인 매듭처럼 남아 있는 최후의 것. 아침의 희망과 낮의 절망 그리고 보잘것없는 시 같은 것들이 모두 섞인 채 남은 최후의 것. 바로 나의 죽음. 죽음이, 끄적거린 시들처럼 남아 있다. 반복되는 희망과 절망과 그리움과 혼란과 정돈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