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낯섦, 어색한 다정함

한들거리는 용기에서 시작되는 위로

by 이솔지

문이 열렸다. 이 문을 여는 순간조차도, ‘한들’은 자신이 정말 문을 열게 될 줄은 몰랐던 듯하다.


멋쩍고 떨리는 마음으로 문화센터 문 앞에 섰다. 그래도 여기 오기까지,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고민은 등록하는 순간까지 충분히 했으니까. 그리고 한들에겐, 이곳에 찾아온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회사의 급한 업무나 친구와의 약속, 여유 있게 샤워하거나 운동할 시간을 포기해 가면서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열린 문 앞에 서서, 한들이,


“다시 왔어요.”


하고 말했다. 이어서 또 이렇게,


“오랜만입니다.”라고도.


어느새 땀이 찼는지 손바닥은 축축했다. 가슴을 약간 떨리게 하던 피는 언제 다 얼굴로 갔는지, 두볼이 뜨겁게 느껴졌다.


일제히,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40대, 50대, 60대, 70대의 여자들. 그리고 30대의 여자. 한들과 동갑인, 그와 잠시 만났던, 그리고 그림을 가르쳐 주었던 사람, ‘윤주’.


모두들 의아한 표정이었다.


“네, 알아요. 5년 만이네요.”

윤주가 말했다.


“어서 오세요.”

그를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 잠시 스쳤지만, 윤주는 미소를 지었다.


“어, 나도 기억난다. 그때 그 2학년 학생 아니여?”

코끝에 안경을 걸친 여자가 말한다.


“아, 저 그때도 2학년은 아니고, 3학년 1반이었습니다.”

한들이 공손히 대답하자, 윤주가 옆에서 쿡쿡 웃었다.


“그런가… 나는 이제 6학년으로 진급했는데, 전학만 갔네? 배움이 느리구만.”

한들에게 알은체를 했던 여자가 답했다.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그러자 곧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하나둘, 한들을 아는 사람들이 오락실의 두더지처럼 머리를 불쑥불쑥 내밀며 한마디씩 했다.


“나도 저 총각 알아. 한 학기 하고 안 나오길래 아지매들 사이에서 쑥스러워 도망친 줄 알았더니. 웬일로, 다시 왔네?”


“아, 저 아재가 그, 아그리파 잘 그리던 그 아재인가?”


“아재는 무슨 아재야, 총각이지.”


“요즘 아아들은 그런 말 싫어혀. 울 손자도 그려. 나이가 어려도 선생이라 하고 대접해 줘야 혀.”


“여기서 선생은 윤주 선생님 하나지 무슨 말이에요?”


한들은 멋쩍게 웃으며, 빠르게 오가는 대화 사이에 끼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문간에 계속 서 있었다.


더는 그를 세워 둘 수 없겠다 생각했는지, 윤주가 문화센터 수채화반 강사로서의 경력을 살려 상황을 중재한다. 수강생들의 재치에 웃음을 간신히 참아 가며, “회원님, 저쪽 빈자리 아무데나 앉으세요.”라고 말했다.


한들은 4절짜리 스케치북과 물감이 들어 있는 검정색 화구 가방을 들고,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 앉는다. 그러곤, “그리고 싶은 그림이 있는데요.”라고 재빨리 말한다.


잠깐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시끌벅쩍했던 다른 회원들은 어느새 흥미를 잃었는지, 각자 그리던 그림으로 돌아가 집중하고 있었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요?”


윤주의 물음에, 한들은 간신히 자신의 할아버지의 얼굴을 그리고 싶다는 말을, 아주 간신히 꺼내놓는다. 목멘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혀뿌리로 목구멍을 꾹꾹 눌러 가면서.


뭔가를 직감한 윤주의 얼굴이 한순간 굳는다. 그러나 곧 다시 돌아오고, 사진을 가져왔는지 묻는다.


“있긴 한데, 여러 장을 참고해도 될까요?”


이번엔 윤주가 아닌, 옆자리 회원이 대답한다.

“되고말고, 나도 우리 손녀 사진 여러 장 놓고 그렸는데? 한 댓장 그렸지 아마?”


“그러니까 말이에요, 우리 회원님 손녀 사랑은 누구도 못 따라온다니까요.”라고, 윤주가 바로 대꾸하며, 한들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한들은 그 ‘괜찮다’에서 어쩐지 위로의 인사도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근데 총각은 왜 할아버지를 그려? 할아버지 사랑이 지극한가 봐. 그래도 젊은 사람이, 이쁜 애인 얼굴을 그리지 않고?”


그 말은 어쩐지 한들과 윤주 두 사람을 모두 어색하게 했다. 하지만 그 어색함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애써도 제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어서요. 보고 싶어서 사진을 봐도, 이건 아닌데 싶은 생각만 자꾸 들어요. 사진에는 제 기억 속 할아버지의 모습이 다 담겨 있지 않더라고요. 모두 할아버지의 일부분일뿐….”


마치 그 말을 하기 위해 이 강의실에 들어온 것처럼, 한들은 자기도 놀랄 정도로 술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강의실 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를 신경썼다.


그분은 자기가 그리던 스시 채색에 열중해 있었다. 5년 전에도 병 때문에 먹지 못하게 된 스시를, 그림으로나마 그리고 싶다며 화폭에 담던 이였다. 종이 위로 붓이 머금었던 코랄색이 덧입혀지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한들은 생각한다. 역시, 잘 찾아왔다고.


이미 3년 전에 다른 동네로 이사도 했고, 금전적 여유도 전보다 커진 만큼 문화센터가 아닌 화실이나 미술 학원을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헤어진 전 애인이 가르치는 문화센터를 찾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윤주의 수강생들은 누구나, 각자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선택해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마음에 들 때까지.


물감이 묻은 팔토시를 끼고, 검은 고무 같은 재질의 앞치마를 두른 윤주가, 한들의 할아버지 사진들을 살펴보며 말했다.


“일단, 구도를 잡을 때 쓸 사진을 하나 정하시고요. 제 생각엔 이 두 장 정도가 구도용으로 제일 괜찮을 것 같아요. 그리고 표정은 여러 사진을 다양하게 참고해 보세요. 아, 필요하다면 거울 보고 회원님 얼굴을 참고해도 좋을 것 같네요. 할아버지와 손자가 많이 닮기도 하잖아요?”


“네, 그렇게 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한들은 이젤 위에 4절 스케치북을 펼쳐 걸친다. 그제야 잊고있던 익숙한 냄새가 느껴진다. 꾸덕하게 마른 물감들의 냄새. 그 물감들을 녹이는 냄새. 붓을 빨아서 거무튀튀해진 물에서 올라오는 냄새.


그리움이 그의 가슴에 푸른색 물감처럼 번져 나간다. 5년 전, 윤주와 함께 처음 그렸던 하늘처럼.


두꺼운 붓으로 수채화 용지에 깨끗한 물을 넓게 펴 바르면 종이는 우글쭈글해졌다. 물에 젖어 운 종이 위로 연하게 푼 파란 물감을 바르면, 은은하게 물감이 번져나가며 자기 영역을 만들어 나갔다. 군데군데 남겨 둔 하얀 부분은 구름이 되고, 물감칠한 부분은 맑은 하늘로 피어 올랐다.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부분은 구름이 되고, 칠한 부분이 오히려 텅 빈 하늘이 된다는 역설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맑음이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윤주에게 배운 뒤로, 한들은 종종 혼자서도 하늘을 그리곤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윤주를 떠나기 전까지 그랬다. 물감 냄새만 잊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하늘을 만드는 즐거움도 잊고 있었다.


한들은 윤주가 골라 주고 간 2장의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 보았다. 오늘 그에게 공식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2시간. 어느새 그중 절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분위기가 5년 전과 같다면, 비공식적으로 사람들은 2시간이 지난 뒤에도 조금 더 그림을 그리며 앉아 있을 것이었다.


“한들 회원님, 골랐나요? 일단 시작해야지, 너무 오래 고르면 안 돼요.”


오른쪽 대각선 끝쪽에 앉아 있는 회원의 그림을 손봐주면서, 윤주가 이쪽을 향해 외쳤다. 한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윤주가 그럼 이제 스케치부터 해 보자고 말한다.


한들은 옆자리 회원을 곁눈질하며 사진을 이젤에 집게로 고정한 뒤, 4B 연필을 들고 스케치를 시작한다. 세워 둔 종이 위로 선을 긋는 감각이 낯설었다. 검은색 육각 연필이 왼손 손가락에 끼워진 느낌은 더 어색했다.


하지만, 처음은 아닌 감각이었다. 익숙한 낯섦, 어색한 다정함이 그의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한들’의 선곡 - 윤하, <없던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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