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속에서의 고독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위한 필수과정

[책리뷰] 데미안 / 헤르만 헤세 / 더스토리

by 솔솔부는 책바람

"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지요.

새도 알을 깨고 나오려면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요.

돌이켜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대체 그 길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아름답기도 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보다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고 있나요?"


데미안 p.194



책은 혼자 읽어도 좋지만, 함께 읽으면 더욱 즐겁다.

독서모임에서 느끼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같은 책을 읽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혼자 읽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새롭게 바라볼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또한 선정된 책뿐만 아니라 각자가 읽었던 다른 책들을 연결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책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서로의 독서 경험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접하고 책과 책이 연결되면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하는 순간은 무척 흥미롭다.

그렇게 다양한 관점이 더해질 때 책을 더욱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번에 새온독에서 읽은 책은 '영원한 청춘의 바이블'인 『데미안』이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10대 시절이었다.

'아브락삭스'라는 단어에 호기심이 생겨 책을 펼쳤지만 내용이 어려워 이해하지 못한 채 혼란과 좌절을 느꼈다.

그럼에도 끝까지 완독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20대에 다시 도전했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내용은 어려웠고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 스스로 만족을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30대에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싱클레어의 입장이 아닌 부모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사춘기에 혼란을 겪을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양육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서처럼 느껴졌다.

40대에 다시 읽은 『데미안』은 내 안에 존재하는 빛과 어둠을 마주하게 하는 책이었다.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전과는 또 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그렇게 10대에서 40대까지 매번 다른 울림을 주었던 『데미안』

그러나 50대에 마주한 『데미안』은 이전처럼 강한 울림을 주지 않았다.

책 속에는 여전히 많은 가르침이 담겨 있었지만 내 인식의 한계는 예전에 읽었던 그 정도 수준에 머물렀고 독서 모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읽어 나갔다.

다른 선배님들은 책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지만 나는 기쁨 없이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


처음 데미안을 읽게 된 계기는 바로 이 문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 안에 갇혀 있었다.

무작정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의 자아를 찾는 것에만 급급했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데미안』을 필사하던 중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작품이 떠올났다.



호랑 애벌레는 단순히 먹고 자라는 것에 머물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한 열망을 품고 길을 떠난다.

그러다 끝없이 솟아오른 애벌레 기둥을 발견하고 더 높이 올라가야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 믿으며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고 정상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기대했던 성공이나 행복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허망한 풍경과 자신과 같은 애벌레들이 끝없이 오르내리는 수백 개의 기둥뿐이었다.




'겉모습'은 죽은 듯이 보여도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있단다.

삶의 모습은 바뀌지만 목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나비가 되어 보지도 못하고 죽는 애벌레들하고는 다르단다.


꽃들에게 희망을


마침내 호랑 애벌레는 깨닫는다.

진정한 성장은 기둥을 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것임을.

그러나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치 속에서 혹독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어둡고 고립된 공간에서 익숙한 모습을 벗고 변화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인 애벌레만이 날개를 펼쳐 날아오를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으며 올라갈 필요 없이 자신의 힘으로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까지 날아오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높고 넓은 세상을 향해 자유롭게 날갯짓할 수도 있다.



새도 마찬가지다.

알속에서 충분히 성장한 후, 때가 되면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하지만 그 안에서 시간 또한 중요한 과정이다.

알이 없다면 새가 몸을 키울 공간도 세상 밖으로 나올 과정도 없을 것이다.

알은 단순한 감옥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보호막이자 필연적인 단계다.



싱클레어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먼저 알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충분히 준비를 해야 했다.

그가 마주한 알은 단순히 벗어나야 할 껍질이 아니라 아브락삭스로 향하는 여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잘못을 빌면 다정한 용서와 따뜻한 위로와 깊은 동정을 받았겠지만,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데미안 p. 49


헤르만 헤세가 그토록 부모의 집과 같은 알을 깨고 나오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유년 시절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경건한 기독교 집안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헤세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그에게 규율이 엄격한 신학교는 감옥과도 같았고 결국 그는 그곳을 탈출했다.



하지만 부모님에 비친 헤세의 모습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문제 행동으로만 여겨졌고 결국 부모는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본래의 자신으로 존중받고 싶었던 그는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부모님은 나를 자신들과 닮은 자식이라는 존재로 생각하실 것이네.

그러나 내가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영혼마저 똑같이 받아들일 수 없기에, 나의 청춘과 변덕으로 그 이유를 둘러대 버리지.

그럼에도 부모님은 나를 위해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 쏟아주시지.

아버지는 자식에게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이성까지도 유전으로 전해준다네.

그러나 단 한 가지, 영혼만은 물려 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영혼은 오직 그 사람만의 것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야."


크눌프


어린 시절, 자신을 무릎에 앉혀 책을 읽어주던 어머니의 모습과 자신의 기질을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 사이에서 그는 복잡한 양가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삶에서 경험한 고통과 갈등은 데미안 속 싱클레어의 여정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헤세가 겪은 방황과 내면의 갈등은 그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성장은 단순히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충분히 탐색하고 고민하며 스스로 준비할 시간을 갖는 과정이다.

애벌레의 고치와 새의 알은 그러한 성장의 본질을 담고 있다.

어둡고 고독한 시간을 견뎌낸 후에야 나비는 마침내 하늘을 날고 새는 힘차게 비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고전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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