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 문학동네
" 젊은 친구,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인데. 분명 어딘가 문제가 있을 텐데 말이지.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약속해 주겠나?"
한스는 엄숙하면서도 온화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력한 권력자가 내민 오른손을 잡았다.
"그럼, 그래야지.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 테니까."
수레바퀴 아래서 p.119
첫째가 기숙사에 들어간 후로 둘째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대화도 더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남자아이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둘째가 워낙 말이 없어 걱정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친한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는지 담임선생님은 어떤 분인지 이야기하던 중 둘째가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친했던 친구가 떠올랐다.
그 집은 첫째와 둘째 모두 우리 아이들과 성별과 나이가 같아 엄마들끼리도 친해 자주 연락하며 지냈다.
혹시 그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는지 물었는데 작년에 자퇴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중학교 때 갑자기 자가면역질환을 앓게 된 그 친구는 체력이 약해져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학교생활도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기에 혹시 건강이 더 나빠진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예전에는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지만 상대 아이의 누나가 대학 진학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동안 연락이 조심스러웠다.
아이들 입시 문제로 오랫동안 미루기만 하다가 며칠 전에서야 드디어 통화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시간 넘게 대화가 이어졌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둘째 아이의 친구가 자퇴한 후 학교에서 보인 반응이 참 씁쓸했다.
그 친구가 자퇴 의사를 밝히자 학교에서는 정규 수업을 마치기도 전에 집에 가도 좋다고 했고 결국 반 아이들과 제대로 인사할 기회도 없이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 일은 아이에게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고 한동안 힘들어했다고 한다.
학업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은 학생 중에는 자퇴를 고민하는 경우가 많기에 학교에서는 다른 학생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많이 신경을 쓴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학교에서 보여준 마무리 방식은 많이 아쉬웠다.
오랫동안 그는 라틴어와 역사와 그리스어와 시험과 신학교와 두통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옛날엔 동화책과 도둑 이야기책도 있었고, 작은 정원에는 자신이 만든 장난감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중략)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 모든 것이 가라앉고 끝이 났다.
가장 먼저 리제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일이 사라졌고, 그다음엔 일요일 오전에 피라미를 잡는 일이 사라졌고, 그다음엔 동화 읽기가 사라졌고, 그렇게 차례로 사라져 결국 홉을 따는 일과 정원의 물레방아까지 사라졌다.
아, 다 어디로 갔을까?
수레바퀴 아래서 p.151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학교와 마을,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어른들이 정해준 길을 따라간다.
그러던 중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친구 하일러를 만나면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그를 동경하게 된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은 모범생 한스와 자유분방한 하일러의 우정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한스에게 하일러와 거리를 두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한스는 하일러에 대한 동경과 끌림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하일러와 어울리면서 한스의 성적은 점점 떨어졌고 학교에서 말썽을 부리던 하일러는 퇴학을 당해 학교를 떠나게 된다.
친구의 부재에 깊은 상실감에 빠진 한스에게 교장선생님은 "학생은 왜 그 잘난 친구와 같이 가지 않았지요?"라며 비아냥거린다.
그 후, 한스는 열등생으로 전락해 관심을 가질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겨지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마치 문둥병 환자처럼 취급받는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그는 점점 더 깊은 상실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되고 강물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하일러라는 인물과 그의 도주는 점차 이야기가 되었고 마침내 전설이 되었다.
훗날 이 열정적인 소년은 갖가지 어리석은 기행을 더 저지르고 더 방황한 끝에 삶의 고뇌를 엄격하게 다스려 위대한 영웅은 아니지만 어엿한 한 남자가 되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p.137
청소년 시기를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로 불리며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변화가 많은 시기이다.
이 시기에 청소년들은 많은 갈등과 혼란을 겪으며 자기만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한스는 하일러를 통해 자신에게 없는 자유로움과 개성을 동경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영혼의 단짝이던 하일러와의 우정은 한스에게 혼란을 안겨준다.
자아를 찾기 위한 방황과 갈등은 사회적 잣대로 인해 하일러는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고 한스 또한 낙오자로 낙인찍힌다.
만약 어른들이 그 혼란스러운 시간을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으로 받아 들이고 지지를 해주었더라면 그리고 한스도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그 경험은 훗날 그에게 큰 자산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과나무 밑 축축한 풀밭에 드러누웠다.
불쾌한 느낌과 고통스러운 두려움과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밀려와 잠도 오지 않았다.
더럽혀지고 모욕당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집에 가지? 아버지에게 뭐라고 해야 하지?
내일 나는 어떻게 될까? 이제 영원히 쉬고, 잠들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낙담했고 비참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이 따끔거렸다.
기운이 없어서 도저히 일어나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불쑥 방금 전 유쾌함의 여운이 때를 놓친 파도처럼 다시 밀려왔다.
한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중략)
노래를 끝까지 부르자 가슴 한쪽이 찌르르 아팠다. 어렴풋한 상념과 기억들, 수치심과 자책감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한스는 크게 신음하고 풀밭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그는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힘겹게 산을 내려갔다.
수레바퀴 아래서 p.212
작은 마을에서 신동 소리를 듣던 한스는 자라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우월감과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수영, 낚시 등과 같은 좋아했던 취미를 멀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더욱더 공부에 매달린다.
하지만 자신의 열정이 아닌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던 한스에게 잘하고 싶은 욕망은 점차 남들보다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점점 더 깊어져 한스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면의 갈망과 외부의 기대 사이에서 갈등하며 혼란을 겪던 그는 결국 어린 시절 가장 행복을 느끼고 마음껏 숨 쉴 수 있었던 강물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어색하기도 하고 조금 감정도 상해서 마치 마차에 스친 달팽이처럼 더듬이를 거두고 자신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수레바퀴 아래서 p.169
교장선생님은 우등생이었던 한스가 성적이 떨어지자 학업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지치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수레바퀴'는 강도 높은 학습량이나 교육 시스템, 어른의 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느끼는 '압박'과 '숨 막히는 두려움'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두려움이 한스의 삶을 압도하며 점차 그를 갉아먹었고 결국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게 만들었다.
나무를 베면 뿌리 근처에서 종종 새싹이 움터 나오듯이 한창때 병들고 상한 영혼 역시 새로 시작한 꿈 많은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마치 그곳에서 새 희망을 찾고 끊어진 삶의 끈을 새로 이을 수 있다는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빠르게 쑥쑥 잘 자라지만 그것이 찾은 건 가짜 생명이고 다시는 제대로 된 나무가 될 수 없다.
수레바퀴 아래서 p.152
새온독에서 함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선배님들이 던진 질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 인생의 수레에 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통해 나는 내가 담고 싶은 것은 '따뜻한 기억을 품은 추억들'임을 알게 되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한 소중한 순간들, 그리고 나를 웃게 하고, 위로해 주었던 사람들과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닌 부분이 아니었을까.
그것들이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내가 힘들 때마다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 되어 결국 죽음의 순간에 웃음을 지으며 인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시험 따위는 단지 피상적이고 중요하지도 않다고 지적하는 데 있었다.
떨어져도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가장 똑똑한 학생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하느님은 모든 영혼에 대해 특별한 의도를 갖고 계시며 각각의 영혼이 자신의 길로 걷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했다.
수레바퀴 아래서 p.16
시험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한스에게 '시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해주었던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처럼 나도 아이들에게 시험의 결과나 사회적인 평가가 너희의 가치를 결정짓지 않는다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이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발견하고 그것을 온전히 활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일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아낌없는 응원과 지원을 보내는 진정한 어른이고 싶다.
나의 소망이 바램으로 그치지 않고 현실로 이어지길 바라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