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 위화 / 푸른 숲
"어이 삼관이, 자네 피 팔아 번 돈 어떻게 쓸지 생각해 봤나?"
"아직 안 해봤는데요. 오늘에서야 피땀 흘려 번 돈이 어떤 건지를 안 셈이죠.
제가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은 땀으로 번 돈이고, 오늘 번 돈은 피 흘려 번 돈이잖아요.
피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지요.
반드시 큰일에 써야죠."
허삼관 매혈기 p.32~33
새온독에서 2주 동안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독서모임의 리더로 작가의 세계관을 깊이 들여다보고 선배님들과 작품 속 이야기를 풍성하게 나누고 싶어 그녀의 초기작 『여수의 사랑』부터 최근작 『빛과 실』 까지 두루 살펴보았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마주하게 하여 책을 읽을수록 마음이 점점 묵직해졌다.
그 감정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고 싶어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책을 찾던 중 요즘 깊이 빠져 있던 중국 작가 위화의『허삼관 매혈기』가 떠올랐다.
위화 역시 폭력적인 역사와 사회를 문학적으로 다루면서도 삶의 고단함과 슬픔을 익살과 해학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한강작가와 사뭇 다르다.
"피를 팔아야지. 식구들 맛있는 밥 한 끼 먹게 해 줘야지."
허삼관 매혈기 p.339
『허삼관 매혈기』는 피를 팔아 살아가는 남자 허삼관의 삶을 그린다.
첫 번째 매혈로 결혼 자금을 마련한 그는 허옥란과 가정을 꾸리고 일락 · 이락 · 삼락 세 형제를 얻는다.
그 이후로도 가족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헌혈소로 향한다.
일락이의 싸움 합의금,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가족이 굶주릴 때, 이락이 상사의 접대비 그리고 일락이의 병원비까지.
일락아, 오늘 내가 한 말 꼭 기억해 둬라.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허삼관 매혈기 p.205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허삼관의 능청이 그저 유쾌했다.
그러나 다시 읽고 나서야 그 웃음 뒤에 숨은 고단함이 보였다.
허삼관은 삶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체면 앞에서는 쉽게 무너졌고 특히 일락이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흔들린다.
옥란이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면 자신도 그래야 한다며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심지어 일락이 친 사고의 합의금을 친부 하소용에게 요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돌린다.
매혈로 합의금을 마련한 뒤 일락에게 따뜻한 국수를 사 먹이고 아이를 업어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는 체념과 연민 그리고 사랑이 겹겹이 포개져 긴 여운을 남긴다.
익살과 해학으로 가려진 고통은 때로 더 아프게 다가온다.
웃음과 슬픔이 맞닿은 위화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방심한 채 웃다가도 그 뒤편에 숨어 있는 서늘한 진실 앞에서 씁쓸함이 번져 나온다.
그가 추구하는 평등이란 그의 이웃들,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아주 재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일을 당했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 생활의 편리함이나 불편 따위에는 개의치 않지만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인내력을 잃고 만다.
그의 이름은 '허삼관'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허삼관은 일생 동안 평등을 추구했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결국 그의 몸에서 자라는 눈썹과 좆 털 사이의 불평이었다.
그래서 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단 말씀이야."
허삼관 매혈기 p.9~10
위화는 서문에서 이 책이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힌다.
문화대혁명 시기 '모두가 평등해지자'는 구호 아래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지식인과 예술인을 핍박하며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자행된 폭력은 오히려 새로운 불평등과 모순을 낳았다.
"나하고 임분방은 딱 한 번 뿐이었다.
너희 엄마하고 하소용도 마찬가지고.
오늘 내가 너희한테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엄마하고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걸 너희가 알았으면 해서다.
그러니 엄마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허삼관은 허옥란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너희가 만약 엄마를 증오한다면, 나도 마땅히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도 너희 엄마랑 똑같은 놈이니까."
허옥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너희 아버지랑 나랑은 다르단다.
내가 아버지 마음을 상하게 해서······· 그래서 임분방과 그렇게 된 거란다······."
허삼관이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은 다 같은 거야."
허삼관 매혈기 p.237
허삼관이 붙든 평등은 달랐다.
허옥란에게 '기생 노릇을 하는 여자'라고 적힌 대자보가 붙자 그는 세 아들에게 다른 대자보로 덮게 한다.
옥란이 목에 '기생 허옥란'이라 적힌 나무판자를 건 채 거리에 서 있을 때 밥 아래 반찬을 숨긴 도시락과 물을 건네는 이도 허삼관이었다.
아들들이 그녀를 비난하려 할 때 그는 자신의 과오도 솔직히 인정하며 맞섰다.
한때는 그도 자존심이 무너지고 흔들리기도 했지만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사랑으로 삶의 균형을 찾아간다.
"일락이가 대장장이 방씨네 아들 머리를 박살 냈을 때 피를 팔러 갔었지.
그 임 뚱땡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피를 팔았고, 그런 뚱뚱한 여자를 위해서도 흔쾌히 피를 팔다니.
피가 땀처럼 덥다고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식구들이 오십칠 일간 죽만 마셨다고 또 피를 팔았고, 앞으로 또 팔겠다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디나······.
이 고생은 언제야 끝이 나려나
허삼관 매혈기 p.171
허삼관이 가족을 위해 자신의 피를 내어주는 장면을 읽으며 나의 첫 헌혈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혈액암 진단을 받고 수혈을 받던 때였다.
'내 피가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헌혈을 시작했고 이후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헌혈을 해왔다.
노인은 허삼관이 이불속에서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당신 행색을 보니 도시 사람 같은데, 당신네들은 깔끔한 걸 좋아한다는 거 내 알지만, 우리 같은 시골 사람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쓴단 말이오······. 그러니까 내 말은······."
노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이 불쾌하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되지 들을 당신 이불속에 넣어주고 싶은데······. 이불속이 따뜻해지게 말이우······."
허삼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왜 꺼리겠습니까? 참 다정하시군요. 한 마리만 주십시오. 한 마리면 충분합니다."
노인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돼지 한 마리를 안고 와서는 허삼관의 발 쪽에 넣어주었다.
(중략)
"돼지 덕분에 이불속이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허삼관 매혈기 p.291~292
허삼관 매혈기는 웃음과 눈물이 오가는 이야기 속에 '평등'과 '연대'의 진짜 의미를 묻는다.
허삼관은 거창한 혁명이 아닌 피를 내놓아 사랑을 증명한다.
움켜쥐는 자가 아닌 나눠주는 자로.
피 한 방울, 따뜻한 국수 한 그릇, 다정한 말 한마디와 같은 소박한 나눔이야말로 사람과 사람을 단단하게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