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한강 / 창비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소년이 온다 p.79
따스한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이 봄의 기운 속 나들이를 부르는 5월이다.
가정의 달,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평소보다 마음의 거리를 한층 더 좁혀준다.
하지만 따뜻하고 화사한 이 계절도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스며든 달로 기억되기도 한다
얼마 전, 아버님께서 담낭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입원하셨다.
거동이 불편하신 데다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병원에 계신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버이날,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아버님이 안 계신 집에서 홀로 쓸쓸한 시간을 보내고 계실 어머님의 마음은 어떨까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예년 같았으면 온 가족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우리 가족에게도 올해의 5월은 유난히도 적막하고 쓸쓸한 그늘이 드리운 달로 남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현기영 작가의『순이 삼촌』이 떠올랐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이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한날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 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멀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 가까운 귀신들이 밥을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이 문장을 떠오르는 순간 자연스레 아픔의 역사가 서려있는 5월의 광주가 오버랩되며 마음이 싸늘해졌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소년이 온다 p.134
신체의 일부가 절단되었음에도 없어진 부위에 고통을 느끼는 현상을 '환지통'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마음에도 그런 통증이 남는 것이 아닐까.
일상을 함께하던 누군가를 하루아침에 잃은 이들에게 상실의 흔적은 몸이 아닌 마음속에 남아 고통을 만들어 낸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 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소년이 온다 p.115~116
한강의 『소년이 온다』 속 동호는 정대의 누나를 찾기 위해 정대와 함께 거리로 나선다.
그러던 중, 시위대와 합류하게 되고 그곳에서 정대는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동호는 친구의 죽음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총부리를 겨눈 군인들 앞에서 정대의 시신조차 지켜내지 못한다.
결국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상무관까지 찾아갔던 동호는 그곳에서 수많은 시신들과 마주한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현실을 동호는 끝내 외면할 수 없었다.
오늘 남는 사람들은 정말 다 죽어요?
묻지 않고 너는 망설인다.
죽을 거 같으면, 도청을 비우고 다 같이 피해버리면 되잖아요.
왜 누군 가고 누군 남아요.
소년이 온다 p.28
동호는 엄마와 형에게 '여섯 시에 상무관 문을 닫으면 집으로 돌아오겠다'라고 약속했지만 결국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계엄군의 진압 소식이 들려왔음에도 그곳에 남은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 안의 양심의 소리를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5·18과 관련된 책을 읽는 것조차 마음에 부담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이 아프고 날카로울지라도 그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이 아닐까.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소년이 온다 p.57
그날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짓밟고 권력을 쥐었던 이들은 오히려 '질서'와 '안정'을 외치며 오랜 세월 기득권의 중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진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진실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그날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 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동호야.
소년이 온다 p.192
그해 오월, 광주에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많은 '동호'들이 있었다.
"해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
동호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소년에게 건넨 그 말이 지금도 가슴 한편에 오래도록 맺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