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세한 실을 잇는 마음에 대하여

희랍어 시간 / 한강 / 문학동네

by 솔솔부는 책바람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희랍어 시간 p.44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소중한 추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한 장면이 내 삶과 겹쳐질 때 그 순간 소설은 하나의 거울이 된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읽는 동안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단짝처럼 붙어 다녔던 친구가 떠올랐다.

사춘기의 거센 바람 속에서 쌓은 우정은 20대와 30대를 지나 40대를 넘어설 때까지 이어졌고 나는 그 친구를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그 관계는 한순간의 어긋남으로 균열을 맞이했고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한강 작가는 소설을 '우리를 연결하는 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이 얼마나 섬세한 실로 연결되어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소리 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희랍어 시간 p.184


이번에 『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와는 다른 부분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예전에는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서사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그들의 곁을 둘러싼 인물들의 목소리에 마음이 더 깊이 머물렀다.

언어와 빛을 상실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느껴졌던 쓸쓸한 온기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지만 그들의 외로움은 결국 주변 인물들과의 연결 속에서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희랍어 시간 p.42


소설 속 남자는 점차 시력을 잃어가며 어두운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의 첫사랑은 어릴 적 열병으로 인해 듣지고 말하지도 못하고 두 사람은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며 그녀에게 독순술로 말해줄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부탁한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 그렇게라도 그녀와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부탁은 절박한 진심이었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결국 이별을 하게 된다.





이따금 너의 화제는 그다지 조심스럽지 않게 내 눈의 상태로, 그것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장래의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지.

그게 내 마음을 은밀하게 다치게 한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명랑하게 너는 말했지.

내가 너라면, 그때를 위해 점자를 미리 배워두겠어.

흰 지팡이를 짚고 혼자서 거리를 걷는 법도 익혀두겠어.

잘 훈련받은 멋진 리트리버를 사서 그 녀석이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겠어.


희랍어 시간 p.110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남자에게 친구 요하임은 현실적인 조언을 건넨다.

점자와 지팡이 그리고 잘 훈련된 리트리버.

요하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들은 다가올 어둠 속에서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점자는 새로운 언어가 되어 줄 것이고, 지팡이는 낯선 길 위에서 넘어지지 않게 해 줄 것이며, 리트리버는 그의 눈이 되어 충직하게 곁을 지켜 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 말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다가올 어둠을 준비하라는 충고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빛을 함께 바라봐 줄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불투명한 비닐봉지를 찬장에서 찾아내서는 얼른 자기 눈에 대보더군요.

으음, 이건 소파고 이건 책장이야.

저건 흰색이고 저건 주황색이야.

이렇게 걸어도 안 넘어질 수 있어.

(중략)

그때 여동생은 진심으로 다행스러웠던 거예요.

아버지의 가까운 미래와 오빠의 먼 미래가,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막 깨달았던 거지요.


희랍어 시간 p.146


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남자가 시력이 아주 나빠질 거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여동생이 보여준 행동이었다.

남자는 어머니에게 "그땐 아주 캄캄해지는 거냐고." 묻고 어머니는 "단지 아주 뿌옇게 될 뿐이다"라고 대답한다.

그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여동생은 불투명한 비닐봉지를 들고 그 너머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오빠가 마주할 미래를 조심스레 들여다보고 그 안에 완전한 암흑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한다.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곁에서 함께 어둠을 마주해 주는 일.

그것이 때로는 어떤 말보다 더 큰 위로이자 진실한 사랑의 방식이다.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밥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 입고 문밖으로 걸어 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이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희랍어 시간 p.83~84


우리는 살아가며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으며 이제야 조금 알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실이 얼마나 섬세하며 그 실을 잇는 마음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를.

그때의 우리는 미숙했다.

비록 끊어진 실을 다시 잇지는 못하더라도 친구와 함께 쌓았던 추억의 조각들이 만화경 속의 아름다운 무늬처럼 내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반짝이기를 나는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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