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일 / 위화 / 푸른숲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아. 조금도 두렵지 않단다. 내가 두려운 건 다시는 너를 못 보는 거야."
제7일 p.135
얼마 전 아버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실 줄은 몰랐다.
슬퍼할 틈도 없이 우리는 장례 준비를 해야 했다.
관의 등급, 수의의 재질, 제단 장식, 음식의 가짓수까지.
누구를 위한 장례인지, 무엇을 위한 형식인지 혼란스러웠다.
아버님을 온전히 보내드리는 자리라기보다 그저 또 다른 소비의 과정 같았다.
그러면서도 너무 초라해 보이진 않을까, 예를 다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체면과 관습의 잔재가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침과 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유골함도 없고 묘지도 없으니 안식의 땅으로 갈 수 없었다.
제7일 p.155
위화의 소설『제7일』에는 죽음 이후에도 수의와 유골함의 등급, 묘지의 위치에 따라 차별받는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 양페이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지만 유골함도 묻힐 자리도 없어 7일 동안 이승과 저승 사이를 떠돈다.
그 여정에서 그는 다양한 죽음의 얼굴을 만난다.
강제 철거로 무너진 집에서 목숨을 잃은 부부,
죽은 여자친구의 묘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장기를 팔다 숨진 청년,
산아제한 정책으로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아기들,
그리고 억울하게 죽었지만 사건이 은폐되어 끝내 죽음조차 인정받지 못한 이들.
그들의 죽음 뒤에는 언제나 경제 논리와 공권력의 폭력, 언론의 침묵이 자리하고 있었다.
심지어 죽음 이후에도 빈부의 격차는 여전했다.
빈의관에서는 VIP와 가난한 이들이 철저히 구분된다.
부자와 권력자들은 호화로운 수의를 입고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지만 가난한 이들은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내몰린 채 자신의 화장 순서조차 기약 없이 밀려난다.
위화는 이런 모습을 통해 현재 중국 사회의 민낯을 냉소적이고도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아무 말도 없고 아무 행동도 없이, 그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무리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제7일 p.227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그렇게 세상에서 소외받던 이들이 죽어서 서로의 죽음을 기억하고 위로하며 애도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장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경사는 안 챙겨도 애사는 챙기라'는 말을 예전엔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떤 위로나 조문도 내 슬픔을 대신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슬픔은 당사자의 몫이라 여겼다.
그래서 조의금만 전하고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장례식장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아버님의 장례를 치르며 위로예배 시간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지인들이 찾아와 아버님을 기억하고 찬송하며 말씀을 나누는 그 시간은 죽은 이를 위한 시간 이전에 남겨진 우리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묘지가 있는 사람은 안식을 얻지만 묘지가 없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제7일 p.215
『제7일』에서 위화가 그려낸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그곳은 슬픔도 가난도 부유함도 고통도 원수도 원망도 없는 평등한 세계였다.
그곳에서의 평안함처럼,
아버님의 장례식에서 나는 공동체의 위로를 비로소 경험할 수 있었다.
장례는 단지 죽은 이를 보내는 형식이 아니었다.
남겨진 이들이 서로의 슬픔을 견디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다시 살아갈 용기를 건네는 시간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믿는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 가운데 새 생명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시작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