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기억의 저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by 솔솔부는 책바람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p.93


예전에는 누구나 알만한 유명한 작품들을 주로 찾아 읽었다.

하지만 이제는 덜 알려졌더라도 평범한 일상을 포착해 내 안의 감정을 조용히 일깨워 주는 숨겨진 보석 같은 책들에 마음이 간다.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나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같은 단편집이 떠오른다.


작품에 등장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미세한 균열이나 겉으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삶의 틈새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감각이 작품들 사이에 닮아 있다.

거창한 서사나 극적인 반전도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나는 이제 스물아홉이고 미혼이다.

아직 늙지는 않았지만 어떤 날에는 늙음이 임박해오고 있음을 자각한다.

태너는 지금, 언젠가 자신의 아내가 될 여자와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녀석이 레올라에, 우리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던 때를 기억한다.

레이첼을 생각할 때면, 10미터 아래로 강을 두고 철로 다리를 건너던 그 경주에 대한 기억이 주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발을 디디는 곳을 보지 않았던,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 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외출 p.180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총 10편의 단편이 담겨있다.

소설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과거의 기억에 발이 묶이거나 그리움 속에 머문다.

어떤 이는 부모의 실패한 삶을 지켜봐야 하고 또 다른 이는 어린 시절 마주한 가족의 비밀을 평생 짐처럼 안고 살아간다.

또한 친구의 죽음을 트라우마처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도 있다.

그렇게 상처와 흉터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조용한 고백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잊고 지냈던 내 안의 감정들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당신이 언젠가 이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헤더."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알아요, 로버트?" 나는 그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 봐 두려워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p.108


표제작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노 교수에게 묘하게 끌리는 여대생 헤더가 등장한다.


헤더는 기말고사 날,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물리학 방정식을 마주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런 문제를 낸 교수에게 항의하듯 시험지를 던지고 강의실을 떠나버리지만 헤더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푼다.

그런 헤더에게 교수는 차 한 잔을 청하고 그 만남을 시작으로 둘의 관계는 조금씩 깊어진다.


헤더는 남자친구 콜린이 채워주지 못하는 어떤 결핍과 안식을 로버트 교수에게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헤더는 충동적으로 로버트의 손을 잡고 그 모습을 콜린이 보게 된다.

이 일은 콜린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두 사람은 결국 결혼한다.

이후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살아가지만 로버트의 죽음 소식이 전해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오래 묻어두었던 침묵과 흉터는 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끝내 서로의 마음을 다 털어놓지 못한 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렇게 몇 분여를 보낸 후에야, 우리는 마침내 뒤로 돌아 우리의 지난 간 행동을 직면한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아술 p.87


제3자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고 객관적이지만 막상 내가 당사자가 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머리로는 옳고 그름을 알아도 마음이 그 이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감정이 개입되면 이성은 더 이상 나침반이 아니라 지나온 길목에 세워진 표지판처럼 느껴진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헤더의 선택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과연 내가 그녀의 입장이라면 달랐을까.

우리는 누구나 그런 모순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간다.




나는 언제나 누나가 만나는 남자들에게 연민 같은 것을 느꼈다.

일면식이 있기 전부터 암묵적인 이해가, 누나의 기분과 기질에 대한 위로의 끄덕임 같은 것이 있다고 할까.

누나는 사귀기에 절대 편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나는 누나를 만난 남자들을 부러워해본 적도 없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폭풍 p.222


『폭풍 속으로』의 화자의 누나 에이미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에이미는 약혼자 리처드와의 여행중, 그의 여권과 돈을 챙겨 혼자 돌아온다.

가족들에게는 "리처드를 두고 왔다"고 했지만 진실은 달랐다.

사실은 리처드가 에이미와의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겠다며 자신의 여권과 돈을 챙겨 혼자 떠났던 것이다.

며칠 뒤 리처드는 에이미에게 사과의 연락을 해왔고 그제야 화자는 누나의 거짓말을 알게 된다.


에이미는 가족의 비난을 리처드 대신 자신이 감당하려 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을 일부러 늘 까다롭고 불편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게 그녀가 견디는 방식이자 사랑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화자는 그런 누나를 보며 어린 시절 언덕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풍경을 떠올린다.

해가 저물고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이 멀리서 비추면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고 있음을 알아채고 환하게 웃던 누나의 얼굴을.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면 누군가를 알게 돼. 익숙해져 버리게 된다고.

그이가 완벽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말이야 바른말이지. 망할 새끼처럼 구는 경우가 안 그런 경우만큼 있을 거야.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폭풍 p.245


사랑의 모습이란 어쩌면 그 사람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때로는 나를 아프게 하더라도 함께한 시간과 기억을 떠올리며 여전히 곁에 머무는 일.

그 시간 속에서 다시금 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 그들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오래전 연락이 끊긴 친구의 안부가 불쑥 궁금해지듯 책을 덮고 나서도 그들의 소식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작가의 이전글죽음을 마주한 우리가 기억하고 보내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