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최인훈 / 문학과 지성사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광장 / 저자 서문 / p.19
수학 능력 평가에도 여러 번 등장했던 최인훈 작가의 대표작인『광장』
교과서 속 고전으로만 알고 있던 작품이었지만,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으며
'균형을 잃은 사회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이 마음 한편에 남았다.
『광장』은 그 물음 앞에 선 한 지식인의 고독한 고민을 그린 작품이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석방 포로 이명준은, 오른편에 곧장 갑판으로 통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배 뒤쪽 난간에 가서, 거기 기대어 선다.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켜댔으나 바람에 이내 꺼지고 하여, 몇 번이나 그르친 끝에,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른팔로 얼굴을 가리고 간신히 당긴다.
그때다. 또 그 눈이다. 배가 떠나고부터 가끔 나타나는 허깨비다.
누군가 엿보고 있다가는, 명준이 휙 돌아보면, 쑥, 숨어버린다.
헛것인 줄 알게 되고서도 줄곧 멈추지 않는 허깨비이다.
이번에는 그 눈은, 뱃간으로 들어가는 문 안쪽에서 이쪽을 지켜보다가, 명준이 고개를 들자 쑥 숨어버린다. 얼굴이 없는 눈이다. 그때마다 그래 온 것처럼,
이번에도 잊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무언가를 잊었다는 것을 깨달은 느낌이 든다.
무엇인가는 언제나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실은 아무것도 잊은 것은 없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느낌은 틀림없이 일어난다. 아주 언짢다.
광장 p.23~24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 위의 명준의 모습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단순한 풍경 묘사로 읽혔지만, 다시 읽으며 깨달았다.
꺼져가는 불빛, 보이지 않는 눈, 그리고 멈추지 않는 바람.
그것은 곧 명준의 인생이었다.
그의 삶은 언제나 불안전하게 흔들렸고, 사회와 체제의 틀 속에서 끝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들어 있다는 것은 풀어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더구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린 지금에.
광장 p.176
이명준의 아버지는 북으로 갔다.
월북한 아버지가 대남방송에 나온다는 이유로 남한에 남은 아들은 '빨갱이의 아들'이라 불리며 고문을 당한다.
사상도 신념도 아닌 피가 죄가 되던 시대였다.
인권이 짓밟히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남한에 환멸을 느낀 명준은 결국 아버지처럼 그곳을 떠난다.
하지만 북한에서도 숨 쉴 수 없었다.
그곳엔 '신념의 광장'만 있을 뿐, 인간의 온기를 지켜줄 '밀실'은 없었다.
그는 다시 떠난다.
이번에는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으로.
요즘 뉴스를 보면 캄보디아로 향한 한국 청년들의 소식이 잇따른다.
그들은 더 나은 삶과 기회를 찾아 떠났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또 다른 절망의 현실이었다.
감금, 착취, 거짓 일자리, 그들이 꿈꾸던 자유로운 삶은 차갑게 무너졌다.
그들의 선택은 어쩌면 명준의 선택과 닮아 있다.
'여기'에서는 도저히 숨 쉴 수 없어 '어딘가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고자 떠났지만, 결국 그 희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삶의 희망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견디고 지탱할 수 있는 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인훈은 명준을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싶어 한 사람'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는 사람답게 설 자리를 찾지 못했다.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명준은 끝내 '다른 곳'을 꿈꾼다.
광장도, 밀실도, 그를 품어주지 못했기에 그는 결국 아무런 경계가 없는 바다를 향한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이념이 작동하지 않는다.
누구의 시선도 규율도 없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명준에게 바다는 경계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값이 있어서만 사람이 행동하는 건 아닐세."
"그럼?"
"값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행동할 수 있어."
광장 p.169
"균형을 잃은 사회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광장은 이 질문을 끝내 풀지 못한 채, 명준을 바다로 던져 보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물음의 시작일 지도 모른다.
오늘의 청년들도 명준처럼 희망을 찾아 떠난다.
한국 사회의 팽팽한 경쟁과 불안 속에서 더 나은 삶을 꿈꾸지만, 그곳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어디'가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이유',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 그리고 희망을 되살리는 '연대'일 것이다.
균형을 잃은 사회에서 그것을 지키는 일,
그것이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광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