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언어를 배우는 일

문맹 / 아고타 크리스토프 / 한겨레

by 솔솔부는 책바람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면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문맹 p.113


이번 주와 다음 주, 독서모임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들을 함께 읽기로 했다.

『문맹』을 읽던 중 한 선배님이 물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왜 굳이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썼을까요?


사실 나도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여러 번 읽는 사이 그 질문은 익숙해졌고 어느새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다.

누군가가 다시 그 질문을 꺼내자 멈춰 있던 생각이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혼자였다면 지나쳤을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만드는 것.

이것이 독서모임의 힘일지도 모른다.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로 글을 썼던 작가들은 그녀만이 아니다.

아일랜드의 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 를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썼다.

그는 모국어로 쓰면 지나치게 유창해져 본질을 흐린다고 느꼈고 낯선 언어의 불편함이 오히려 군더더기를 걷어낸다고 여겼다.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밀란 쿤데라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직접 프랑스어로 쓰기 시작했고 언어적 정체성까지 새롭게 정립했다.



그들에게는 타국어가 하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경우는 달랐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까웠다.

헝가리를 탈출한 그녀가 정착한 곳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였고 짧은 프랑스어 실력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전할 수 없었던 그녀는 스스로를 '문맹'이라 불렀다.

어린 시절부터 능숙했던 읽기와 쓰기를 스물여섯에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타국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 쉽지 않듯 타인의 언어도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그것을 새삼 느꼈다.

20대에 만나 어느덧 중년이 된 우리들은 안부를 묻다 보니 어느새 자식 이야기로 흘러갔다.

한 친구가 취업을 못한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컴퓨터 공학과는 친구 아들이 입학할 때만 해도 유망한 전공이었다.

하지만 몇 년 사이 AI가 세상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동기 여자아이들은 그나마 취업이 됐는데 군대 다녀온 남자아이들은 돌아와 보니 그 사이 자신의 자리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친구는 속상한 마음에 지인에게 하소연을 했고 그 지인이 '아이의 사주가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사주를 맹신하는 건 아니지만 아이에게 잔소리하고 싶어질 때마다 그 말이 떠올라 한 번 더 참게 된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웃음반 푸념 반의 고백이었다.

그런데 그 말 끝에 다른 친구들의 대답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는 종교적 잣대를 들이댔고 누군가는 기도를 권했다.

온기를 담은 말들이었을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 말들은 폭력처럼 느껴졌다.

작은 위안 하나로 오늘 하루를 버티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 조그만 버팀목을 굳이 흔들어야 했을까.

그런데 나 역시 생각을 그만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훈계처럼 들렸을 그 말이 뒤늦게 후회로 돌아왔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침묵이었을까.



우리는 같은 한국어를 쓰고 있지만 왜 이렇게 자주 어긋날까.

내가 자란 방식, 내가 믿는 가치, 내가 통과해 온 시간들이 각자 다른 모국어를 만들었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소통은 '번역'에 가깝다.

무엇이 옳은지 보다 상대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일.

친구의 절박함을 종교라는 자신의 언어로 재단했던 말처럼 나 역시 나만의 언어로 타인을 재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문맹 p.34


문맹의 표지에는 눈동자 아래로 번진 눈물과 먹물자국이 흐른다.

그 위로 꽃들이 피어 있다.

활짝 핀 꽃도 있고 아직 다 피지 못한 봉오리도 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읽고 울면서 잠들던 밤을 지나 결국 문장이 태어났다고 작가는 말한다.

어쩌면 타인의 언어를 배우는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꾸 어긋나고 후회하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들.

그 눈물 자국 같은 실패들이 모여 결국 이해라는 꽃을 피운다.

어제보다 조금 덜 서툴기 바라며

나는 오늘도 '서로'라는 낯선 외국어를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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