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 어머니의 첫 번째 남자

by 솔솔솔파파

평소와 같이 월요일에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집에서 혼자 TV를 보고 계셨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더니 TV 바로 앞에서 뭔가를 찾고 계셨다. 난 들어가자마자 놀라시지 않게 "저 왔어요."라고 조금은 큰 소리로 인사를 드린다. 눈이 잘 안 보이는 어머니에게 소리는 마지막 남은 피아식별의 방법이다.


"뭐 찾으세요?"

도움을 드리기 위해 재빨리 여쭤보았다.

"가수들 노래 부르는 것을 여기 어딘가 했었는데 도무지 보이지 않아서 어디를 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네가 한번 찾아봐라." 하시면서 리모컨을 건네신다.


이젠 눈이 점점 침침해지셔서 포기하는 것들이 많아지신다. 예전에는 밝은 눈으로 하시는 일도 많으셨는데 조금씩 나빠지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성격이 깔끔하시고 부지런하신 분이라 여전히 안 보이는 눈으로도 집안은 깨끗이 정리하시지만, 집안 구석에는 쌓인 먼지는 이제 어쩔 수 없다.


난 갑자기 어머니의 연애사가 궁금해졌다. 옛날에 어머니가 키도 크고 늘씬해서 동네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들어서 어머니의 눈은 얼마나 높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엄마, 엄마는 아빠 말고 다른 남자는 없었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머니는 나를 쓱 쳐다보시면서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시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웃으시며 말씀을 꺼내셨다.


"있었지. 20대 중반쯤인가... 친척 어르신이 소개해줘서 광화문에서 선을 봤어. 봤더니 덩치도 크고 눈도 부리부리한 군인이었어. 헌병이었는데 직업군인이더라고. 그때는 박정희 때라 군인이라고 하면 직업으로는 괜찮았지. 근데 이 남자가 나랑 몇 분 이야기하더니 반지를 맞추러 가자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싫다고 했지.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반지를 맞추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까 제발 우선 반지만 먼저 맞추면 안 되냐고 사정을 하더라고. 그래서 난 안 된다고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왔지. 젊었을 때 나는 당돌한 성격이었거든."

말씀 중간중간 웃기도 하시고, '라떼는 말이야~' 하는 자부심도 느껴졌다.


"그래서요? 그리고 헤어지고 끝난 거예요?"

"아니, 그리고 집에 왔는데, 며칠 뒤 옆집 쌀집 아저씨가 나보고 전화를 받으라는 거야. 그래서 나는 전화 올 사람 없다고 안 간다고 했어. 그랬더니 너 이름까지 얘기하면서 바꿔 달라고 했으니 받아보라는 거야. 그래서 가서 받았더니 그 남자인 거야. 우리 집에 전화기가 없으니까 우리 집에서 가까운 쌀집 전화번호를 알아가서 전화를 한 거지. 근데 그 남자가 내일 휴가를 나가니까 자기를 잠깐만 만나 달라는 거야. 그래서 일단은 알았다고 했지. 근데 다음 날이 돼도 연락이 없는 거야. 그래서 약속을 잘 안 지키는 남자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다음 날 어떤 여자 2명이 찾아와서 나한테 '저기 혹시 옥자(가명)씨 맞나요?' 하는 거야. 그래서 '네. 맞아요.' 했더니 '우린 기수(선 본 남자) 누나들이에요.' 하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 동생이 왜 못 왔는지 얘기를 하더라고. 휴가를 받아서 부대에서 나오다가 차 사고가 나서 4명 중 3명이 크게 다쳤는데, 그 남자만 경상이었다는 거야. 그래서 집안 어른들이 “그 여자 만나러 가다 사고가 났는데 너만 안 다친 거 보면 그 여자를 꼭 잡아야 한다”라고 하셨다는 거야. 그리고 그 남자의 엄마가 막내아들 장가보내고 눈을 감는 게 소원이라고 해서 우선 약혼식만 하고 결혼은 천천히 하면 안 되겠냐고 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를 만나서 직접 설득해 보려고 왔다고 하더라고." 옛날 결혼관에 신기해하면서 난 결말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우리 집도 가게를 했는데, 아버지는 물건 사러 전국 팔도를 돌아다녀서 가게에 잘 없으시고, 가게에서 물건 팔고 정리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그래서 내가 시집을 가면 우리 집은 가게에서 장사할 사람이 없었던 거야. 결국 부모님의 반대로 그 약혼은 없었던 일이 되었고, 이 남자도 더 이상은 안 찾아오더라고. “


어머니에게 외할아버지는 태양 같은 존재였다. 일편단심 태양만 보고, 태양의 따뜻한 미소를 보고 자랐다. 아들이 없던 외할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든든한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결국 결혼의 반대도 외할아버지 때문이었고, 훗날 결혼도 외할아버지 때문에 하시게 되셨다.

동네 사진관에서 일하던 한 남성은 성실했고, 말이 없었다. 동네 총각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어머니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지만 그 남성은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의 그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으며 어머니도 그 남자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입대를 앞둔 그 남자가 외할아버지를 찾아와 중요한 문서 하나를 맡아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 남자는 서울에는 가족도, 믿을 만한 친구도 없어서 평소에 인사하며 지낸 외할아버지에게 전 재산과도 같은 땅문서를 맡겼다. 지금의 제3한강교 옆 자리의 땅이었다. 그 남자는 군대를 갔고, 외할아버지는 사업이 망해서 어쩔 수 없이 그 남자가 맡긴 땅문서를 담보로 팔아야 했다. 제대한 그 남자는 땅문서를 요구했고, 외할아버지는 땅을 팔았음을 그때서야 시인했다. 그 남자는 전 재산을 잃은 슬픔에 어떻게 해서든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외할아버지는 초조해하셨다.


그리고 그 초조함은, 결국 어머니의 결혼을 결정짓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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