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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쏠이 Nov 19. 2023

커피메이커를 좋아합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나온 가정용 커피메이커

<멀홀랜드 드라이브>. 너무 예전에 봐서 내용은 흐릿하지만, 영화에 가정용 커피메이커가 나왔다는 건 또렷하게 기억난다. 거기서 나오는 커피메이커를 보고 “오, 세상에 저런 게 있네? 나도 저거 있으면 너무 좋겠다!” 싶었고 그 길로 아빠를 조르고 졸라 3만 원짜리 커피메이커를 하나 얻어냈다. 내가 살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20대 초반, 얼마 되지 않는 알바비로 생활해야 하는 극강의 거지 상태에서 필수품이 아닌 커피메이커에 3만 원을 쓰는 건 꽤 큰 지출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나에게 3만 원이 크지 않다는 건 아니고 어쨌든 그렇게 아빠를 설득해 얻어낸 테팔 커피메이커는 나와 거의 6년을 함께 했다. 커피메이커를 처음 썼을 때 무슨 느낌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도 꽤 행복하지 않았을까? 늘 미국 영화에 나오는 팬케이크 집(Diner) 커피를 마셔보고 싶었는데, 영화에 나오는 거랑 비슷하게 생긴 주전자에서 나온 커피를 집에서 마신다는 게 좋았을 거다. 사실 지금도 이런 이유로 커피메이커 커피를 좋아한다. 미국 영화 속 팬케이크 집(Diner) 점원들이 컵에 한가득 따라주는 커피가 바로 이 기계로 내린 커피라는 생각이 들어 좋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나는 커피 맛은 잘 모른다. 커피와 얽힌 기억에 의존해서 커피를 마시는 편이다. 물론 카페인이 필요해서 마시는 경우가 제일 많다.



<트윈픽스>, <펄프픽션>, <위대한 레보스키> 에 나오는 다이너 모습


나의 테팔 커피메이커는 이제 없다. 집과 거리가 먼 회사에 다니게 되면서 집에서 커피 내려 마실 시간이 없어 아예 사무실로 가져가서 썼는데, 어느 날 출근해 보니 주전자가 깨져 있었다. 커피메이커는 전용 주전자가 없으면 사용하기가 상당히 번거로워진다. 본체는 이상 없는데 전용 주전자 가격이 새 커피메이커 값보다 비쌌다. 멀쩡한 본체를 버리기는 아깝고 주전자가 없으면 쓸 수가 없어서 본체만 당근 나눔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냈다. 그분은 용케 알맞은 주전자를 구하셨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커피메이커는 떠났다.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테팔을 보내고 한동안 커피메이커 없이 지내다가 퇴사하게 되면서 새로운 커피메이커를 하나 샀다. 이번엔 내돈내산. 나의 평화로운 퇴사 라이프를 위해 하나 장만했다. 최초로 드립커피를 발명한 밀리타 벤츠가 설립한 회사인 ‘Melitta’에서 나온 ‘아로마 보이’다. 다른 것보다도 생긴 게 꼭 <셰이프 오프 워터>에 나올 것 같이 생겨서 이걸로 정했다. 이게 테팔보다 사용하기 번거로워서 가끔 나의 ex-커피메이커가 생각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잘 쓰고 있다. 아주 작아서 딱 한 잔 내리면 끝인데, 이 점도 꽤 마음에 든다. 생긴 것도 귀엽고 쓰면 쓸수록 마음에 든다. 이것도 테팔만큼 아니, 테팔보다 더 오래 써야지.



새로 산 아로마보이를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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