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너머의 당신에게'
갑자기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진짜 오래된 기억이라 다시 떠올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이상하게도 문득 당신이 보낸 엽서가 떠올랐어요.
당신도 기억하나요?
우리가 처음 마주한 건 1997년 봄이었어요. 그때 벤치에 앉아 있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인 제게 당신이 먼저 말을 걸었죠.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무얼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냐'라고 물었던 것 같아요.
저는 아마 '소설을 쓰고 있다'라고 답했을 겁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처음 만났고 첫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제 우연히 인터넷을 돌아보다 당신이 보냈던 엽서와 똑같은 사진을 봤어요. 그 장면이 아니었더라면 다시는 당신을 떠올리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때 당신은 세계여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어요. 여름이면 유럽으로 6개월쯤 떠난다고 말했죠. 우리는 일요일마다 도서관에서 구내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곤 했어요.
7월 첫째 주 일요일 당신은 제게 말했죠. 다음 주에 유럽에 간다고 그러니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요.
나는 매번 당신이 가져오던 수제 과자와 빵을 우유와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어요. 당신은 가끔 나와 대화를 나누며 도서관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기도 했죠.
당신이 떠난 지 2~3주쯤 지났을 때 우리 집으로 엽서가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쩔 때는 한 번에 세 장씩 오기도 하고 간혹 2주에 한 번 오기도 했죠.
그때 나는 나이 어린 고등학생이었고 당신은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대학생이었어요. 그럼에도 저는 당신을 만날 일요일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훌쩍 유럽으로 떠난 뒤 좋아하던 도서관에도 두어 번 갔었지만요.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비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발걸음을 끊게 되었어요. 내게 일요일은 전부는 당신이 돼버렸으니까요.
그럴 무렵 당신의 엽서가 도착했어요.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곳에서 보내온 손글씨의 엽서. 어떤 건 짧고 어떤 건 길었고 어쩔 때는 하루에 세 번 보낸 것도 있었어요. 제가 평생 못 볼 기이한 우표를 잔뜩 붙여 보내기도 했어요.
27년 전의 기억이라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졌나 봅니다. 다시 당신을 망각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습니다.
저는 그때 너무 어렸고 사랑을 알기에는 성숙하지 못했기에 당신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당신과 함께 나눴던 수많은 이야기들. 함께 걷던 거리들. 당신이 선물로 주었던 책과 영화 포스터, 노래 테이프. 이 편지를 쓰며 하나둘 떠오릅니다.
그 이국의 땅에서 당신이 들려주던 손으로 써 준 이야기들도 어렴풋이 되살아나요.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동안 당신을 완전히 잊고 지내서 미안합니다. 그때 당신이 한 소년에게 건넨 격려와 응원들이 중년이 되어서야 조금은 이해됩니다.
지금이라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 그 마음이 닿을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서 받기만 했지, 정작 저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어요.
그저 어디서든 행복하길 빌어요.
정말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