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자격 하는 것은

비와 당신의 이야기

by 진이설

장마철이다.

쿰쿰한 흙내가 창문 틈을 타고 밀려든다. 하루 종일 축축한 공기가 눅눅한 담요처럼 나를 감싼다. 이런 날 나는 자주 내 안을 들여다본다. 나는 어떤 자격으로 살아가는가.


사전에서 자격은 신분이나 지위를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나를 자격 할 수 있을까? 회사원. 흡연자.

예전 여자친구는 내게서 크라잉넛과 필립모리스가 떠오른다고 했고 오래된 친구는 버드와이저와 담배 연기가 어울리는 사람이라 했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일까? 교집합 하면 나는 담배였던가. 타들어가며 제 냄새를 풍기는 존재였던가?


얼마 전 오사카 워크숍이었다. 선술집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언어는 다르지만 소음은 결국 소음이었다. 일본인들의 웃음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동료들의 이야기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때 문득 입대 전 마지막 밤 나이트클럽이 떠올랐다. 흔들리는 조명 아래 폭음과 줄담배를 피면서도 정신은 또렷했다. 중심을 잃지 않던 그때의 나는 맑은 소리를 내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나는 맑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 맑음에 닿고 싶다. 닮지 못하더라도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지금의 나는 이데아의 세계 어딘가에서 울림을 지닌 원본을 꿈꾸는 열화판이다. 모조품이지만 진심을 닮고 싶은 사람이다.


내 존재는 그 원본을 희미하게 반사하는 거울 조각 같다. 빛이 어디서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나는 그 흐린 방향을 조심스레 추적하고 있다. 내 안엔 아직도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다. 타들어간 잿더미 속에서도 불씨는 남아 있는 법이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다. 이 글쓰기는 내 존재를 명명하려는 작은 몸짓이다. 문장이란 옹기 안에 나를 담아야 비로소 나의 자격이 작은 울림이라도 세상에 전해진다. 나는 지금 마치 스스로에게 세례 하듯 내게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조금은 억지스럽고 서툴지만 그것마저도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비는 모든 것을 씻어내지만

때로는 오래된 것을 불려 다시 떠오르게도 한다.


내 안에 잠겨 있던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윤흥길 선생님의 소설 「장마」

빗속에서 형제는 갈라지고 집안은 진흙처럼 가라앉았다.


“아, 비가 와도 진흙은 굳어진다네.”


먹먹한 문장이다. 그 시절 사람을 나눈 건 신념이 아니라 자격에 대한 착각이었다. 누구의 자격이 옳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대답되지 않았다.

멀지 않았다. 올해도 그날이 다가온다.


나는 원본에 최대한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고기를 줄이고 탄수화물을 덜어내며 해조류와 채소를 더 먹는다. 뭔가를 쓰고, 조용히 걷고, 다시 쓰고, 조금 더 견디며 산다. 오래오래 살아남아 내 자격이 무엇인지 끝까지 고민해보고 싶다.


장마는 언젠가 그친다. 햇살은 흙내를 지우고 기억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다.


언젠가 나는 어떤 자격으로 이 생을 마치게 될까? 죽기 전 한 문장으로 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이 눅눅한 계절을 견디며 계속 써나갈 것이다. 나를 자격 하기 위해서.


2025년 6월 19일 늦은 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