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씌어진 글

‘문장 앞에서 나는 자주 부끄럽다’

by 진이설

어느 작가는 수필이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했다.

그 말은 내게 오랫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나는 수필은 쉽게 쓰는 글이라 여겼다.

노인들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툭툭 던지듯 쓰는 글. 그래서 덜 중요한 글.

젊은 시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소설만이 진짜 창작이고 시는 그다음이며 평론은 창작이 아니라 해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너무 편협한 생각이었다.

어린 내 생각에 평론은 창작자 곁에서 빙빙 도는 그림자 같았다. 수필은 그보단 나았다.

적어도 누군가의 삶에서 우러난 진짜 말이니까.


그런데 그 믿음은 소설을 배우면서부터 무너졌다.

소설 쓰기는 내게 커다란 장벽이었다. 단단하고 차갑게 버티는 벽.

내가 쓴 문장은 자꾸 어긋나고 이야기는 길을 잃었다.


그래서 시로 방향을 틀었다.

시는 한 줄 한 줄이 칼날의 푸른 예기처럼 날카로워야 했다.

하지만 그 톱날 같던 내 칼날에 손을 베었다.

내 생각에 시는 천재의 몫이었다.


결국 나는 글과 멀어졌다.

텅 빈 공기처럼 글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십수 년을 글과 멀리하며 빙빙 돌다가 올해 초 나는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 모임에 들어가 마감에 쫓기며 글을 썼다.

어설픈 마음에 수필이라면 내 일상을 담으니까, 쉽겠지 싶었다.

붓 가는 대로 쓰면 되니까.


그런데 쓰면 쓸수록 어려웠다.

문장은 쉽게 흘렀지만 그 문장을 뽑아내는 일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버거웠다.


내 생각에 수필은 나를 드러내는 글이다.

내 안의 불편한 방 한 칸을 타인에게 열어 보이는 일.

문장 사이에 스며든 감정이 들킬까 부끄러웠다.

누가 읽든 안 읽든 나는 여전히 눈치를 보았다.


글쓰기 모임에서 낭독할 때면 목소리가 떨렸다.

내 문장이 허술하게 들릴까 봐.

내 마음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봐.


게다가 일상은 바빴다.

글을 쓰고 싶다고 해서 바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필(Feel)'이 와야 글 쓰는 사람이었다.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며.

커피숍 나무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놓고.

공원 벤치에서 바람을 맞으며.

미술관 앞 잔디밭에 앉아 햇살을 느끼며.


그날의 공기와 자리 머리를 스치는 바람. 손끝의 온기가 문장을 불러왔다.

그럴 때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글을 썼다.


내게 온 문장들은 씨앗 같았다.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흩어질 민들레 홀씨.

그렇게 당장 쓰지 못하면 나는 문장을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다르다.

마감에 쫓겨 겨우 끄적인다.

쓰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써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문장을 적는다.


그러니 처음 모임에서 썼던 글과 지금 쓰는 글의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이 다르면 문장도 달라진다.

문장이 달라지면 나도 달라 보인다.


글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때로는 너무 투명해서 두려운 거울.


그렇게 나는 글쓰기의 무게를 늦게 알았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었다.

문장을 쓰다 보면 감춘 마음이 고개를 든다.

외면했던 감정이 문장 틈에서 새어 나온다.

미뤄두었던 장면이 불쑥 떠오른다.


그럴 때면 나는 순간 움찔한다.

이게 진짜 나인가.

이걸 누군가에게 보여줘도 괜찮은가.

그 물음이 자꾸 되풀이된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를 떠올린다.

시인은 이렇게 썼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 말이 가슴을 찔렀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시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하지만 시인은 몇 번이고 고쳐 썼을 것이다.

문장을 해체하고 다시 붙이고 소리 내어 읽고 다시 다듬었을 것이다.


쉽게 써진 시는 없다.

쉽게 써진 글도 없다.


나도 글을 쓴 뒤에는 꼭 한 번 다시 읽는다.

맞춤법을 고치고 어색한 문장을 다듬는다.

지나치게 튀는 문장은 줄이고 흐름을 매끄럽게 한다.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떳떳한 글을 완성해야 하니까.


퇴고는 글을 씨앗에서 나무로 키우는 일이다.

뿌리가 단단해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글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

인생도 그렇다.


어릴 땐 인생이 쉽게 풀릴 줄 알았다.

지금 돌아보면 쉽게 살았던 적은 있었지만 쉽게 풀린 적은 없었다.

쉽게 써진 인생도 쉽게 써진 글도 결국 없었다.


글은 삶을 닮았다.

강물처럼 흐르다 막히고 다시 흐른다.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거칠다.


화엄경의 '일체유심조'를 종종 떠올린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

그 문장은 나를 다잡기도 하고 흔들리게도 한다.


글을 쓸 때는 마음을 가볍게 먹고 싶다.

마음을 묶고 있는 것들을 풀어내고 싶다.

누군가의 가슴에 맺힌 마음을 풀어주는 문장을 건네고 싶다.

적어도 쓸 때만은 쉽게 쓰고

읽는 이의 마음에 와닿는 글을 쓰고 싶다.


2024년 5월 19일

자정을 앞두고

바람이 문장을 실어 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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