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를 듣던 밤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고말고"

by 진이설

어젯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끝까지 들었다.

과거에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의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왔다.

간혹 익숙한 문장이 마음을 스치긴 했으나 그 문장들이 언제 어디서 내 삶을 지나갔는지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어쩌면 대학 시절 기숙사 방이었을까.

간헐적으로 깜빡이던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그를 마주했던 것 같다.

아니면 늦여름 밤 1호선 지하철 안에서 읽던 장면이었을까.

비 오는 날 지하철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네온사인처럼 기억은 불분명했다.

그러나 그 흐릿함 덕분에 오히려 개츠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울밤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파카(Parka) 틈새로 스며들었다.

유인나가 읽어주는 「위대한 개츠비」를 들으며 나는 닉 캐러웨이의 시선을 따라 그 화려하지만 공허한 세계로 들어갔다.

잔잔한 배경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개츠비를 만났다.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벌어지는 사치스러운 파티 중심에서도 그는 외로웠다.


그의 눈빛은 데이지의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의 마음은 끝내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미 소설은 완결되어 있었고 그의 결말 또한 정해져 있었다.


죽음이었다.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를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자꾸만 「좀머 씨 이야기」의 초록빛 표지가 떠올랐다.

쓸쓸한 풍경이 그려진 그 표지처럼 두 이야기는 어딘가 닮아 있었다.

개츠비와 좀머 씨는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 살았지만 그들은 외로웠다.

개츠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이야기했지만 마음 깊은 곳엔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있었다.

항상 어디론가 떠나려 했던 좀머 씨 역시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 개츠비의 텅 빈 마음이 나를 끌어당겼다.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나는 외로운가.


수십억 명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갇혀 산다.

너무 고요해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듣고 싶어서도 외롭고 너무 많은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도 외롭다.

외로움은 마치 이유 없이 찾아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

아마 우리도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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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게 그날 밤만큼은 달랐다.

유인나의 목소리가 개츠비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나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그의 사랑에 마음 아팠고 그의 죽음 앞에서 가슴 저렸다.

나는 사람들의 무관심에 화가 났다.

그의 이야기에 빠진 나는 차가운 겨울 도시의 소음마저 잊었다.


그 순간 떠오른 기억이 있다.

십수 년 전, 독서실에서 밤새 공부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새벽 네 시쯤 텅 빈 독서실에 홀로 앉아 있던 그 순간의 막막함.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결국 나는 혼자구나 하고 느꼈던 그 밤.

개츠비의 마지막 순간도 그랬을까.

수영장에 떠 있던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데이지의 전화를 기다리던 그의 마음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나는 유인나의 목소리를 따라 피츠제럴드의 세계를 건넜다.

그들의 시간이 내 것이 되었다.


삶은 때로는 아주 작고 소소한 순간들로 기억된다.

큰 사건들은 희미해지고 따뜻한 햇살이나 사랑하는 이의 손길 같은 것이 더 오래 남는다.

몇 해 전, 친구와 함께 마셨던 커피 향기.

늦은 밤 골목길에서 들려오던 연인들의 웃음소리.

그런 순간들이 나를 붙잡는다.


그날 밤도 그랬다.

유인나의 목소리와 개츠비의 이야기가 조용히 내 안에 스며들었다.

하늘에는 시리도록 푸른 겨울달이 고요하게 빛났다.

그 달빛 아래에서 나는 개츠비를 애도했다.

그의 죽음은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중학교 때 처음 읽었던 「어린 왕자」가 떠오른다.

사막에서 만난 여우가 말한 길들임에 대한 이야기.

그땐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문장은 처음엔 작가의 것이지만 독자의 마음에 닿는 순간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피츠제럴드와 닉과 개츠비 그리고 내가 한 호흡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 나의 외로움은 물러났다.

문학은 나를 낯선 세계로 데려가고 다시 나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개츠비의 파티가 끝난 뒤 텅 빈 저택처럼 내 마음도 가끔 비어 있다.

그 빈 공간을 채우는 건 결국 이야기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이야기.

종이 위에 적힌 이야기.

그리고 내 안에서 함께 살아 숨 쉬는 이야기.


2024년 1월 22일 늦은 겨울밤.

내 세계에서도 개츠비는 죽었다.

나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겨울달이 조용히 빛났다.

마치 개츠비의 꿈처럼 아련하면서도 선명했다.


이 밤의 기억이 스무 해가 지나도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외롭지 않았다.

삶은 때때로 문학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덕분에 견딜 만해진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내 안에서 조용히 울린다.

그 울림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언젠가 또 다른 겨울밤, 개츠비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면

나는 그 밤의 달빛을 기억할 것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간절한 꿈을 떠올릴 것이다.


나도 내 삶에 남아 있는 푸른 열정에 조용히 손을 뻗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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