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낀 창틀 너머

"먼지 낀 창틀은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잡을 수 없다."

by 진이설
“먼지 낀 창틀은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잡을 수 없다.” 영화 《화양연화》 중에서

1.

화양연화.

꽃이 만개하던 시간.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

하지만 나는 자꾸 묻게 된다. 그런 시절이 정말 내게 있었던 걸까?

이미 지나간 걸까?

아직 오지 않은 걸까?


혹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것은 아닐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나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회상은 그저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는 일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계속 희미해졌다.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래된 책의 글씨처럼 점점 옅어졌다.

내 기억은 늘 조각난다.

한 장면, 한 감정이 안개처럼 떠오르다 흩어졌다.

나는 낡은 스틸컷처럼 남은 감정만을 쥔 채 살았다.

먼지는 쌓인다.

창틀에도 책상에도 그리고 내 마음 한구석 기억 속에도.


2.

영화 화양연화를 떠올리면 화려한 색감이 먼저 스친다.

장만옥의 단정한 걸음과 화려한 치파오.

양조위의 슬픈 눈빛과 클래식한 정장.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던 냇 킹 콜의 목소리.

“Quizás, quizás, quizás...”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 그들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인생의 절정이랄 수 있을까.

나는 사랑은 이루어지는 순간보다 망설이는 찰나에 더 빛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주저하던 순간에 감정이 더 깊게 스며든다.

왕가위의 카메라는 언제나 조용히 질문을 던지고 답 없이 사라진다.


3.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이미 지나간 걸까.

지금 오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직 저 멀리에 있는 걸까.


확실한 것은 영화 속 그 대사처럼,

“먼지 낀 창틀은 볼 수는 있지만 손으로는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도 그렇다. 떠올릴 수는 있지만 되돌릴 수는 없다.

가끔 오래된 기억이 실타래처럼 얽혀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간다.

망설이다 덜 꺼낸 말들. 너무 빨리 사라져 버린 감정들. 정리되지 못한 기억들.

후회는 언제나 조용히 찾아와 오래된 책에 낀 마른 꽃잎처럼 마음 한구석에 눌러앉는다.


4.

과거 나는 늦은 밤 혼자 카세트를 틀고 냇 킹 콜의 ‘Autumn Leaves’를 들었다.

창밖에는 낙엽이 흩날리고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미루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 어둠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잃었을까.


5.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찬란함은 젊음의 다른 이름일까. 그 시절의 나는 불안정했고 감정에 쉽게 휘둘렸으며 삶의 방향도 또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불확실함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으려 애쓴 우물 속 개구리처럼 말이다.


공자가 마흔을 ‘불혹’이라 했던 뜻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혹하지 않는다는 것은 감정이 식은 상태가 아니라 깊은 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 찬란함을 잃지 않았다. 매일 작고 단단한 빛이 매 순간 내 속에 깃든다.


6.

예전처럼 반짝이는 옷을 입는다고 그때의 싱그러움이 되살아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삶은 새로운 얼굴로 찬란함을 품고 돌아온다.

어떤 날의 찬란함은 누군가의 다정한 말 한마디에 있고

어떤 날은 아침 햇살처럼 등을 토닥이며

어떤 날은 우연히 들른 재즈 카페에서 냇 킹 콜의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L-O-V-E”를 들으며 생각했다.

사랑은 네 글자만큼 단순하면서 한 생애로도 담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찬란한 것은

젊음만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그것이 이미 지나갔고

누군가에겐 지금이며 어떤 이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일 뿐.

찬란함은 특정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는 순간들의 결이다.

먼지 낀 창틀조차 특정한 각도에서 보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나는 늘 찬란하고 매 순간 빛난다.


7.

먼지 낀 창틀은 닿지 않지만 그 너머로 들어오는 빛은 여전히 방 안을 채운다.

나는 창가에 앉아 그 빛을 바라본다.

먼지와 빛이 뒤섞인 기억 속 오후.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시간 속.

후회와 희망이 공존하는 마음들.

그날의 감정들은 태풍처럼 격렬했고 태풍의 눈 아래처럼 고요했다


어디선가 냇 킹 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어쩌면 바람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게 실재인지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Quizás, quizás, quizás...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이 순간이 바로 내 인생의 화양연화이다.

화양연화란 지나간 뒤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