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며칠 전 고모가 돌아가셨다.
지난주 요양병원에 계신 고모가 퇴원 시기를 조율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조만간 찾아뵈려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침대에서 낙상을 당하셨고
골반이 골절되어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작은형이 했다.
그 소식에 마음을 졸이던 중 결국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고모는 코로나 시기에 고모부를 먼저 보내고 혼자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하셨다.
점점 야위어 가시다 공기 좋은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는데
건강을 차츰 회복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오래되지 않아서 더 충격이었다.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난 지도 벌써 만 30년이 넘었다.
고향에 들르면 고모를 찾아뵙던 기억이 선하다.
이제는 그 고모가 세상을 떠났다.
큰형과 고모부가 세상을 떠난 뒤로 고모댁은 이상하리만치 스산하게 느껴졌다.
건강하던 큰형이 뇌출혈로 갑작스레 세상을 떴고
그 충격 때문인지 고모부도 오래지 않아 뒤따르셨다.
고모는 그 상실을 오래 앓으셨다.
사촌 누나는 지금 유방암 투병 중이고
이젠 고모까지 그렇게 되셨다.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
그 끝이 얼마나 조용히 다가오는지를 요즘 자주 생각하게 된다.
항상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우리를 맞아주시던 고모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고모는 여전히 그 집에 계실 것만 같다.
몇 해 전부터 부모님께 매년 골다공증 검사를 받으시라고 당부했다.
어르신들이 골절 사고를 당하시면
오래 못 버티는 경우가 많다는 걸 여러 번 봐왔기에
적어도 뼈에 좋은 영양제만큼은 빠뜨리지 않고 사드렸다.
언제부터인가 고향을 떠올릴 때면 늘 고모가 함께 떠올랐다.
이제는 고향에도 먼 일가 몇 분만 남아 있다.
나는 그분들과 연락도 하지 않는다.
벌초 때나 한식 시사 때 잠깐 마주치는 분들인데
너무 연로하신 분들이라 그마저도 오래 뵙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리에 내 또래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종가 큰 형님을 가끔 뵈었지만
이제 조상님들을 선산이 아닌 수목장으로 모시면서
나 역시 거의 찾아가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고향산천이 내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내 고향 충북 영동군은 감이 유명한 고장이다.
어느새 포도가 더 유명한 지역이 되었지만
내가 살던 시절엔 곶감이 단연 으뜸이었다.
가로수도 감나무였고 가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을 따고 깎아
곶감을 만드는 일에 나섰다.
달달한 곶감이 줄에 길게 매달려 하얗게 눈꽃처럼 변하면
그것을 곱게 포장해 도회지로 팔았다.
나는 가끔 밤에 친구들과 곶감 서리를 했다.
거의 서리를 같이하는 녀석들의 집에서 말리는 곶감이었다.
하나둘 빼서 녀석들과 나눠 먹었다.
우리 집 곶감도 녀석들이 서리하곤 했다.
부모님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셨다.
자기 집 곶감은 본인은 서리를 안 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 시절의 장난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을산엔 돌배가 지천이었고
밤나무 아래에선 돌을 던져 밤을 따기도 했다.
호두나무를 털거나 맑은 계곡물에서 가재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다.
내 고향 영동은 논보다 밭이 많아
과수와 표고버섯 농사가 발달한 고장이었다.
소박했지만 생각보다 풍요로웠다.
하지만 이제 고향에 가도 나를 반겨줄 사람이 거의 없다.
고모가 돌아가시고 나니
마치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고향의 봄
작사 이원수 / 작곡 홍난파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렇다. 내가 살던 고향은 봄이면 꽃 피는 산골이었다.
우리 집 앞마당에는 봄이면 살구꽃과 자두꽃이 피었고
여름이면 냇가에 반딧불이가 반짝이며 어둠을 수놓았다.
그 무렵 밤하늘은 은하수가 융단처럼 펼쳐진 세계였다.
이제는 고향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그 시절이 꿈처럼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