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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스파이의 아내> 리뷰

거대한 연극 안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까?

일본의 과거 역사에 대한 고발극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평면적이다. 이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역사에 대한 고발극, 또 다른 한편으로 맹목적인 남편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한 여인의 멜로, 다른 측면으로는 스파이물로써의 긴장감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가장 크게 눈길을 끈 부분은 메타픽션적인 이 영화의 요소다.

세상에는 수많은 연극이 존재한다. 국가와 부부 사이도 거대한 연극일지 모른다. 스파이의 역할도 연극이고. 역할은 존재하고 그 역할 속에서 사람들은 체스판의 말처럼 정해진 길을 움직인다. 체스판이 뒤집어지고 말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바뀌더라도 결국 체스판의 말이 갈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다. 판은 뒤집어졌어도 국가주의 구조 안에서 개인의 속성, 가부장제 또는 가정주의 안에서의 아내의 속성은 쉽게 변할 수 없다. 게임의 문제가 아니라 어찌보면 부여되어 버린 역할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규칙으로써 내재되어서 어찌 바꿀 수 없는 연극의 역할이다.

국가에서 개인들의 역할은 정해져 있다. 순진하게도 국가의 논리를 믿는 개인들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애국이라는 역할을 배정 받아서 걷게 된다. 츠모리 타이지의 자리 뒤에 있던 충효라는 글자 국가가 국민에게 배정한 배역이다. 개인들은 국민이라는 배역을 받고 그 역할을 하기 바쁘다.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시나리오 속에서 개인은 각 자가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른 상태로 하나의 부속품처럼 연기한다.

하지만 모두가 부속품은 아니다. 배우가 연출가의 연출 안에서도 자신만의 해석과 배역을 하는 것처럼 유사쿠처럼 자신만의 해석으로 새롭게 나아가는 배우도 있다.

가정, 부부 내에서의 부여된 역할에 사토코는 충실하다.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만을 바라본다. 그 역할에서 사토코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고 해야하는 역할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스스로 연출가가 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를 찍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유사쿠의 디렉션 안에서 이뤄지는 사토코의 연기는 영화의 마지막을 마치 예견하는 듯하다. 자신의 역할에 맞춰서 감독의 디렉션에 의해 움직이는 배우 그게 사토코다.

국가에게도 국민들은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러간 유자쿠와 사토코는 일본뉴스를 보게 된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듯한 일본. 평화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 같은 일본. 이게 국민들이 보고 있는 모습이다. 개인들은 그런 뉴스, 프로파간다를 통해서 국가라는 연출가의 디렉션을 받고 국민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나 전체주의 하에서 국민이라는 역할을 더욱 강하게 강요되며 수행된다. 집단이라는 작품 안에서 개인은 거대한 연극을 못 본 상태로역할 극에 집중하게 된다.

바뀐 필름이 상영된 이유는 알 수 없다. 유사쿠가 진짜 필름을 빼돌리고 밀항을 성공하기 위해 사토코를 이용한 건지, 아니면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일부로 그런 건지. 중요한 것은 부부로서도, 스파이로서도 사토코는 역할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거대한 연극 안에서 자신의 위치가 뭔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배우가 사토코다.

사토코, 개인 등은 그 안에서 불안을 느낀다. 거대한 작품을 볼 수 없는 배우들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연극 전체를 볼 수는 없다. 연출가만이 관객만이 전체를 보면서 향유할 수 있다. 개인은 필연적으로 의심한다. 사토코가 유자쿠를 의심한 것처럼 부부 관계라는 연극 안에서 자신의 부여받은 역할을 충실히 실행하지만 그 이면과 상황을 크게 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국민이라는 역할을 부여맡고 수행하지만 국가라는 거대한 작품을 볼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좋은 작품이 나오길을 기대하는 것 뿐이다.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배우, 개인, 아내는 그런 점에서 이용당한다. 악의는 없다. 그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배우였을 뿐이다. 믿을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믿는 것뿐인 그런 역할극의 아이러니가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폭격이 쏟아지는 도심을 벗어나서 해변을 걷고 있는 사토코. 폭격은 이 거대한 연극의 마지막 환호성과 같다. 전체주의가 만든 거대한 거짓 속 연극의 마무리 같기도 하다. 전체주의 국가는 국가라는 연출가가 국민들을 속이는 거대한 연극이었다. 패전으로 그 연극은 마무리를 향했다. 사토코의 연극도 그 안에서 마무리를 향해갔다. 스파이 행위라는 연극은 전쟁과 함께 끝을 향해갔다. 마지막 사토코의 해변에서의 절규는 자신의 연극이 마무리되면서 모든 것을 쏟은 배우의 해우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 이 끝나버린 연극 이후 자신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그런 모습이기도 하다.

영화 속 연출과 연기는 연극적이다. 이 모든 게 제작비나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 같다는 느낌이다. 국가, 가족, 그리고 인생이라는 게 거대한 연극이라고 연기하는 우리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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