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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아네뜨> 리뷰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봐야 하는 걸까?

예술 작품에서 어떠한 목적이 사라질 때 온전히 그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분명 영화다.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예술이고, 음악을 연주하는 과정이다. 영화는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는 스튜디오에서 시작하고 레오 카락스라는 프로듀서가 앉아서 모든 상황을 지휘하고 있다. 연주자들이 연주를 시작할 때 영화는 시작된다. 특히나 영화의 시작은 소리와 연관되어 있다. 연주자들이 튜닝을 하면서 소리가 온전하지 않을 때는 화면도 온전하지 않다가 소리가 온전할 때는 화면도 온전하다. 음악, 또는 영화가 수많은 사람들의 의해서 연주되는, 또는 제작되는 과정이다. 레오 카락스는 프로듀서이자 감독으로 그 순간을 지휘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과 함께 있다. 딸과 함께 하는 자신이 만드는 음악이고 영화인게 이 <아네트>다. <아네트>라는 레오 카락스의 영화이고 그가 생각하는 예술이다. 여기서 <아네트>라는 제목은 중요하다.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 속 안과 헨리의 딸의 이름이다. 즉, 영화 속 '아네트'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그 아네트가 하는 행동, 아네트의 변화는 레오 카락스가 생각하는 예술의 의미, 영화의 의미 등과 연결된다고 볼 수도 있다. 영화 속 안과 헨리는 대칭점에 있는 캐릭터다. 안은 엘리트 예술, 고급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오페라를 부른다. 헨리는 대중예술, 혹자는 저급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한다. 안과 헨리는 어찌보면 감독의 자아일수도 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퐁네프의 연인들>과 같이 우아하며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었던 레오 카락스이자 안일수 있고,  <메르드>, <폴라X>, <홀리 모터스> 등 광기어린 작품을 만든 레오 카락스이자 헨리일 수 있다. 오페라는 비극이며, 스탠드업 코미디는 희극이다.어쨌든 모두 레오 카락스이고, 대중예술이든, 고급예술이든 예술이다. 둘의 만남은 예술, 그 자체이다. 그게 바로 아네트이고 아네트는 예술 자체이자 레오 카락스 자체다. 희극과 비극이 만나는 극의 모든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레오 카락스가 사랑하는 딸이고 레오 카락스가 사랑하는 예술이다. 둘, 그리고 셋은 화목한 삶을 살기도 했고 열혈히 서로를 좋아했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이고 한 쪽은 사라졌다. 희극은, 대중문화는 비극, 엘리트문화, 순수예술를 비난하고 몰락했다고 말했다. 대중은 대중문화를 천박하다고 경멸했다. 하지만 어떠한가 살아남은 것은 결국은 대중문화고, 비극이다. 헨리는 대중이 비난을 받았다. 안은 승승장구하고 잘 나갔다. 하지만 살아남은 것은 헨리다. 최근의 레오 카락스는 처음에 순수한 감정을 담아내던 네오이마주의 감독, <퐁네프의 연인들>, <소년 소녀의 만나다> 등의 감독이 아닌 어느 순간 괴인이 되어 있다. 지금에 살아 남은 레오 카락스는 광인인가하는 질문이 남는다. 하지만 헨리는 온전치 못하다. 스스로 살아남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안을 계속해서 갈구하는 삶이다. 안은 헨리를 저주한다. 헨리는 안의 저주 안에서 온전하지 못하다. 예술은 그러하다. 대중문화는 스스로 고급문화를 갈구한다. 대중문화는 고급문화의 혼령 안에서 아직도 머무르고 저주를 받는다. 고급문화의 기준으로 대중문화는 평가받는다. 고급문화는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은 죽어도 아네트 안에 안이 있는 것처럼 예술은 그렇게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하나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레오 카락스도 마찬가지다. 광인이 괴인이 된 듯한 레오 카락스이지만 결국 레오 카락스는 초기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다 남아 있는 레오 카락스다. 하지만 예술은 온전치 못하다. 아네트라는 예술은 상업적인 목적에 이리저리 치인다. 지휘자라는 사람은 분명 순수한 예술에 대한 꿈이 있다. 하지만 돈이라는 명예라는 목적에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고 휘둘린다. 순수예술을 잃어버린 돈만 추구하게 된 대중예술은 술과 여자에 취한다. 예술, 즉 아네트를 돈벌이의 도구로 볼 뿐이다. 돈 벌이만 추구한 지휘자, 순수한 예술에 대한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결국 대중예술, 즉 헨리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다. 예술을 꿈꾸었지만 돈과 명예에 취해 순수한 예술을 잃어버린 자의 최후인가. 아네트라는 예술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렇게 지휘자, 예술을 꿈꾸었던 지망생이자 도전자는 대중문화의 휩쓸린 건가. 아네트는, 예술은 결국 대중문화의 추악함을 고발한다. 그리고 대중예술, 헨리는 결국 감옥에 간다. 더 이상 예술, 아네트를 돈이라는 목적으로 보지 않게 될 때 온전히 아네트를 볼 수 있게 됐다. 결국 목적없이 순수히 아네트를 볼 수 있는 순간, 대중문화도, 관객도 아네트를 볼수 있는 순간 진짜는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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