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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더 배트맨> 리뷰

배트맨이 주인공인 배트맨 영화.

배트맨 영화들은 항상 배트맨이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너무도 인상적인 빌런 탓에 배트맨은 항상 변두리에 있었다. 또한 완성된 캐릭터로서의 배트맨은 스스로 질문하지 않고 갈등하지 않았다.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의 배트맨에게는 질문이 있지 않았는가 생각할 수 있는데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속 배트맨은 배트맨은 확신을 가졌다. 영화를 통해 질문을 가지고 갈등한 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었다.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에서 갈등하는 것은 관객이고 플롯이었다. 하지만 <더 배트맨>은 다르다. 배트맨이 주인공인다. 2년차 아직은 초보일 수 있는 슈퍼히어로 배트맨이 복수와 정의는 어떻게 다르며 그 다름을 희망에서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 정확히는 웨인이라는 이름과 고담의 과거를 통해서 가야할 길을 다시 고민하는 영화다. 영화 속 액션은 사실 재미없다. 영화가 줄 수 있는 액션의 쾌감에서는 낙제점이다. 하지만 그래서 이 영화는 오히려 빛이 난다. 나약한 인간인 배트맨, 그 속에서 액션은 현실적이고 그래서 일반적인 영화들이 액션을 통해 주는 쾌감 대신에 현실적인 공포와 두려움을 준다. 그 두려움 배트맨도 느낀다.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주저하고 잘 못된 착지를 하고, 동네 불한당과 싸우면서도 맞는 사람다운 고민과 고뇌, 두려움을 가진 히어로다. 특히 배트맨이 등장하는 방식은 공포에 집중한다. 배트맨은 갑자기 등장하는 경우가 이 영화에서는 없다. 배트카도 엔진소리와 함께 강한 빛으로 상대방에게 공포를 예열하고 등장한다. 배트맨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짠 하고 나타는 경우는 없다. 육중한 슈트를 입고 어둠 속에서 서서히 걸어나온다. 그런 배트맨의 공포와 두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영화의 초반부 배트 사인이 하늘에 뜨고 범죄자들이 두려움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배트맨의 탄생에는 공포라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배트맨은 자신의 트라우마인 공포를 자신의 무기로 만든 히어로다. 그런 배트맨이 가진 공포라는 캐릭터성을 그 장면 하나로 완벽하게 설명해낸다. 배트맨은 스스로를 복수라고 말한다. 하지만 복수는 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 현대는 철저히 법으로 처벌해야 한다. 복수라는 배트맨이 자신을 부를 말 자체는 본인도 위법적인 정의에 물음표에 서있는 자경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리들러의 추정자들도 스스로를 복수라고 말한다. 리들러는 리들러 나름에 정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리들러가 나름의 정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복수라는 방식의 정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그 복수라는 스스로의 정의를 벗어나 희망과 희생으로 슈퍼히어로가 된다. 이건 어찌보면 이 영화가 또 다른 '배트맨 비긴스'로 볼 수 있다는 복수에서 희망으로 그냥 자경단에서 슈퍼 히어로 나서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의 갈림길은 어찌보면 책임과 희망의 의미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동시대의 영화 같지는 않다. 과거 필름느와르 장르다. 슈퍼히어로 장르보다는 필름느와르에 가깝다. 배트맨 슈트만 입었을 뿐 탐정으로 추리하는 장면이 배트맨에게 더 많고 고든 경감과 공조수사를 한다. 둘의 공조 수사는 서로를 믿지 못하지만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잘 드러나며 잘 짜여진 구조를 보여준다. 필름 느와르의 탐정이 마주치는 것은 부패하고 희망 없는 세상인 것처럼 배트맨도 결국 그 것을 본다. 그런 점에서는 마치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마피아들의 잔혹한 세계를 보면서는 마치 <대부> 같은 측면도 있다. 리들러는 데이비드 핀처를 떠올리게 한다. 퍼즐을 내고 맞추게 하는 부분에서는 <조디악>이, 연쇄살인과 메시지에서는 <세븐>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우중충하고 어두운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는 어둠이고 그 자체로 공포를 보여준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배트맨이 가진 어둠을 느낄 수있다. 연출은 빛과 조명 등으로 그 것을 잘 살렸다. 희망이라고는 없는 어둠의 도시 고담과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트라우마 속의 배트맨을 영화 속 화면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어둠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빛을 또한 그려낸다. 마지막에 장면은 해가 떠오르기 전 여명이다. 조명탄을 터뜨린 배트맨은 희망과 함께 어둠 속에서 빛이 된다. 여명과 조명탄이 빛나는 이유는 어두워서다. 배트맨이 슈퍼히어로가 되는 이유도 어둠이 있어서라는 게 영화에서 어둠과 빛을 통해서 그려낸다. 결국 악당이 있기에 슈퍼히어로가 있고 배트맨이라는 영웅은 필요적으로 어둠을 몰고 온다. 리들러도 영화 속에서 배트맨이 있었기에 가능한 악당이었다. 마피아의 조직들도 토마스 웨인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처럼. 그런 어둠과 빛, 희망과 절망, 복수 등 속에 있는 배트맨을, 그리고 고담을 화면과 영화는 잘 그려낸다. 리들러는 배트맨을 계속 부른다. 리들러가 리들러가 될 수 있게 한 것은 배트맨이다. 배트맨이 필요도 결국 리들러를 비롯한 악당들이 만든다. 스스로를 선과 정의라고 생각하는 배트맨이 결국 리들러가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복수를 선이고 정의로 본다면 그것은 분명한 한계다. 리들러도 나름의 정의가 있다. 그 잘 못된 정의를 배트맨은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가 이 영화의 질문이다. 이 영화는 초짜 배트맨, 갈등하는 배트맨을 그린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패트슨은 최고의 배트맨을 보여준다. 물론 외모만 따지면 지금까지 최고의 배트맨은 벤 애플릭일 수도 있지만 이건 강력한 배트맨, 부자 브루스 웨인이지. 갈등하는 배트맨은 아니다. 로버트 패트슨은 어딘가 나약한 모습이 있다. 눈동자는 흔들린다. 몸조차도 완벽한 입금 근육을 보여주지 못한다. 어딘가 왜소한 몸을 슈트로 큰 양복으로 가린 느낌을 준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는 그의 혼란을 잘 보여준다. 나약한 인간 초짜 히어로 배트맨 그 자체를 보여주며 <더배트맨> 속 주인공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영화는 물론 아니다. 액션과 독립적인 스토리 자체로는 셀레나 카일은 좋았다. 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와 함께 본다면 혼자 기름처럼 떠있었다는 점은 아쉽다. 셀레나 카일과 배트맨의 감정선은 지극히 피상적이라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셀레나 카일은 도대체 왜 자신의 실종된 친구를 그렇게 열심히 찾는지 도대체 왜 그런지 그점도 이해가 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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