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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우리집> 리뷰

'우리'와 '집'을 깰 때 보이는 것

유독 자주 나오는 것은 계란 요리다. 껍질이라는 딱딱한 보호막을 깨야 하는 요리들. 집도 계란의 껍질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라는 집단도 깼을 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계란을 깨고 노른자와 흰자 그리고 파, 마늘 같은 것을 버무려 요리를 한다. 경계를 허무르고 어울리는 과정에서 요리는 탄생한다. 집, 우리, 가족 그 속에 담긴 경계를 허무르고 어울리는 과정을 말하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 유미가 하나에게 "우리 언니 해줄거지?" 묻는다. 하나의 대답은 "너희 언니"다. 한국어의 어법상 '우리'와 '너희'라는 대답이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우리'라는 단어와 '너희'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서로 간의 차이를 말하는 것 같다. '우리'라는 단어에는 연대감도 담겼지만, 집단적인 폭력성도 담겨 있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우리'라는 단어 속에서 나와 같기 바라는 폭력성이 있다. 감독은 전작인 '우리들'에서도 '우리'라는 단어의 폭력을 담았다면 이 작품도 유사한 연장성이 보이는 것 같다. '우리'라는 단어로 명명하기 보다 말로 굳이 담을 필요 없는 연대의 감정이 중요함을. 계단에서 '우리'와 '너희'의 대사 이전에 해변에서 상자로 만든 우리집을 부수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사뭇 상징적이다. 서로 우리라고 믿었던 유미와 하나가 다투고 우리라는 믿음을 파괴한다. 그 이후 유미와 하나, 유진은 가장 우리다운 순간을 맞이 한다. 결국 우리라는 유대를 만드는 것은 상징이나 언어가 아니라 우리라는 연대감과 행동이다. 하나는 가족 여행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의 대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전에도 가족여행을 떠난 이후 가족은 다시 화목해졌다고 했다. 여행은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난 행위다. 여행에서 가족에게 요구되는 몇몇의 행동은 사라진다. 요리를 하지 않으며, 청소를 하지 않고, 집안일도 사라진다. 여행이라는 과정에서 일상의 근검절약도 사라진다. 집이라는 공간이 주던 제약에서 탈출의 순간을 보여주는 게 여행이다. 집이 주는 억압이나 의무감에서 여행이 주는 순간. 집, 즉 가족이라는 의무감이 만드는 억압은 즐거운 나의 집이 오히려 괴로운 나의 집으로 느껴지게 한다. 집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어떠한 측면에서의 억압의 탈출이 필요하다.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다. 여행을 떠나고 온 하나, 하나의 가족도 하나를 찾기 위해 집이 아닌 공간에서 방황하고 왔음을 관객은 추측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았던 집을 벗어난 밤 사이의 여행은 집의 가치가 아닌 가족의 가치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에도 들리는 밥 먹는 소리는 식구라는  말이 복원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불안하게 무너질 것 같았던 가족,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무감을 벗어나서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마무리된다. 식구라는 표현도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상기된다. 먹고 산다는 표현이 과거에는 식구로 함께 산다는 의미였을지 모르지만 요즘은 현실의 무게를 느끼면 일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먹고 산다는 의미는 말 그대로 사전적으로 먹는다 일 뿐이다. 텐트에서 텐트 천장을 보며 유진이 묻자 하나와 유미의 대답은 말 그대로 먹다에 해당하는 대답들 뿐이었다. 어른들이라면 이내 직업이나 돈 나올 구석을 생각했겠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한 집에서 사는 식구는 더 이상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이 아니다. 생계의 무게 안에서 사는 피로한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먹고 산다의 의미와 식구의 의미가 변해버린 것처럼. 하나는 집안일 특히 요리에 관심이 있다. 말 그대로 먹는 행위를 공유하는 식구를 바란 것이다. 가족들이 모여서 밥을 먹는 식구이길 바라지만 말처럼 되지 않는다. 그 대신 유미, 유진과 오므라이스를 먹으며 식구가 된다. 하지만 갈등의 순간에도 밥이 있다. 주말에 함께 집에 있자고 말하는 유미 앞에서 하나는 가족 여행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분식집에서 대화는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는 분식을 먹지만 유미는 먹지 않고 떠난다. 식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유미의 부모를 찾으러가다가 버스정류장에서 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유미와 유진은 샌드위치를 먹지만 하나는 샌드위치를 먹지 않는다. 유미와 하나는 함께 먹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더 이상 식구가 아님을 표현한다. 하지만 상자로 만든 우리집을 부수고 다시 함께 구운 감자를 먹는다. 우리집은 부셔졌으니 같은 '집', '우리집', '우리'라는 테두리는 없다. 하지만 의무감으로 사면을 둘러쌓는 집이 없어도 식구라는 연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행의 순간은 그럼 의무감에서 서로를 탈출시키는 기회다.  유미는 공간으로서 '집'이 위협 당한다면, 하나는 개념으로서의 '집'이 위협당하고 있다. 하나가 주인공이다 보니 다분히 개념으로서의 집이 먼저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가 유미와 가까워지며 점차 공간으로서의 집도 보이는 영화다. 어느 것에도 우월은 없다. 여행이라는 과정이 공간의 '집'을 벗어나는 행위지만, 개념으로서 '집'을 보존한다. 공간의 '집'은 그 자체로 개념으로 '집'을 억압한다. 유미의 가족이 화목해 보이는 것은집이라는 공간이 집이라는 의미와 떨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두 의미의 집이 하나로 합쳐진 하나의 가족은 공간으로 강화되고 억눌러지는 집이라는 뜻에 화목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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