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미지의 코드> 리뷰

형식 실험

영화의 처음과 끝은 청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단어 맞추기로 시작한다. 세상과 쉽게 소통할 수 없는 아이들이지만, 그들 간에도 온전한 소통은 되지 않는다. 영화는 시작과 끝에서 파편화된 소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흔히들 사람들은 타집단 간에 원활하지 않은 소통을 문제 삼는다. 문화권, 계급 등 다른 집단 간에 소통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하면 소통이 되지 않는 것, 생활과 삶이 분절된 것은 인간이 지닌 태생적인 한계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목소리, 타인의 말, 타인과의 소통은 알 수 없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 게 인간의 삶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형식적인 특성이 돋보인다. 모든 시퀀스는 원테이크의 플랑시퀀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시퀀스 간에는 명확한 암전이 이루어져 있다. 분명 플랑시퀀스는 의도된 단절을 살리기 위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만약 각각의 시퀀스가 다양한 컷들로 구성된다면 시퀀스 간의 단절은 별로 크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시퀀스를 플랑시퀀스로 구성시키면서 단절은 훨씬 명확하게 관객에게 전달된다. 단절을 전달하기 위한 의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크게 세 집단 또는 네 집단의 에피소드는 처음에 해프닝을 제외하면 연결성이 없는 에피소드다. 연결성 없는 시퀀스 구성, 에피소드에서 이 영화는 단절을 담아낸다. 단절의 형식, 단절의 이야기가 영화를 크게 감싼다. 각 자의 삶, 그리고 영화의 장면들 조차 소통되지 않는다. 연결은 없다.  줄리엣 비노쉬가 맡은 안느는 왠지 모르게 쉽게 와 닿는다. 너무도 잘 알려진 배우라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안느의 삶은 단절되어 있다. 배우로서 인생이 있지만, 현실의 인생도 있다. 특히 지하철 씬은 그런 느낌을 잘 살린다. 배우로서 모습과 다른 현실의 모습, 타인과 타인 간의 관계나 만남도 아닌 한 개인의 삶도 단절되고 연결되지 않는다. 연결의 지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벌어지는 해프닝, 그리고 식당 장면 등 무심한 척 연결은 존재하지만, 그저 지나간다. 그렇게 잠깐 잠깐 이어지는 해프닝이나 스쳐지나가는 순간만 있을 뿐이다. 안느의 남자친구인 조르쥬가 종군 사진기자이다. 세상을 연결하는 듯하는 직업이다. 프랑스 파리의 어느 안전한 카페에서, 혹은 집안에서 코소보, 아프칸의 전쟁 사진을 본다. 분명 두 공간은 연결되었다. 하지만 그 연결은 온전히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방관이 있을 뿐 단절된 관계성과 다를 것 없다. 안느가 지하철에서 당하는 모욕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방관만 있다. 나는 그 사건과 연결되고 싶지 않다.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발적인 단절을 선택한다. 소통이 되지 않는다. 물론 도움을 주는 사람은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 대부분의 시간, 단절이 존재하지만 잠시의 연결이 존재하는 것처럼. 처음의 해프닝과 같이. 영화의 엔딩 장면, 어찌할 지 몰라서 황망해하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터질 듯한 불안함을 동반한 상태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어찌할 지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단절된 상태로 존재하고, 혹은 자발적으로 단절을 선택하지만 결국 단절 안에서 불안하는 모습을 그린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온다>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