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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산책하는 침략자> 리뷰

'개념'이 인간을 만드는 건지, 인간이 '개념'을 만드는 건지

영화를 보면서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외계인은 왜 지구를 침공하는가의 문제다. 영화에서 이 문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본 행성에서 자원이 없어서, 혹은 무절제한 영토 욕심, 아니면 인류가 우주에 해가 되니까, 인류가 아름다운 별 지구를 파괴하니까 등등 수많은 이유를 거론할 수 있지만 외계인이 지구에서 인류를 지우려는 이유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외계인이 인류를 지우려는 이유는 인류 그 자체에게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외계인은 인류 그 자체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인류가 인류 스스로를 점멸하고자 하는 욕심은 인류가 생존하고자 하는 욕심과 함께 존재하는 양면의 날이다. 그런 점에서 외계인은 어떠한 특이한 모습도 없다. 인류의 모습 그대로 등장한다. 인간과 같이 음료수를 마시고 밥을 먹는다. 마지막 엔딩에 전멸의 장면이 등장하기 전까지 진짜 바이러스라고 믿어도 영화의 진행은 무리가 없으며, 그저 일종의 정신병 같은 거라고 해도 상관없다. 인류의 모습이고 인류의 행동을 하고 있으니, 단지 '개념'을 모으는 행동만 있을 뿐이다. 그들을 외계인 이전에 그저 '개념'이 없는 인류로 봐도 영화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개념 없는 인류의 모습으로, 개념을 수집하는 인류의 모습으로 개념 속에 살고 있는, 개념에 사로 잡힌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개념을 수집하는 개념없는 외계인이라는 거울 통해서 '개념'에 사로잡힌 인간의,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은 '개념'이다. 개념에 대해서는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다. 인간을 인간 자체로 만들어 내는 그 요소가 개념일 수 있다. 혹은 다양한 개인들을 정의하는 것이 개념일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개념이 사라질 때 변화하는 모습은 다양하게 등장한다. 히키코모리, 사장 등 많은 영화 속 등장인물은 개념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개념이라는 모습 속에서 인간은 정의된다. 개념을 그저 하나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인간은 정의되고, 행동한다. 언어의 규정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진다. 개념이라는 단순한 언어에 갇힌 인류가 그렇게 변하고 정의된다. 개념을 수집한 외계인은 결국 개념 안에 사로잡힌다. 물론 개념 중에 최상의 개념은 사랑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오글거리지만, 개념을 하나하나 모은 그들이 인간의 개념을 파악했을 인간을 살려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지가 나루미를 평생 지키겠다는 다짐, 그 속에서 인간의 개념에 사로잡힌 외계인의 모습이 된다. 영화에서 나루미와 신지의 관계는 매력적이며, 영화의 메시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사쿠라이, 아마노, 타치바나, 이 삼자의 구도 다소 매력이 떨어진다. 나루미와 신지가 멜로라면, 사쿠라이는 호러를 담당하는 듯하지만 영화는 이 분할된 구조 속에서 다소 산만해지며 집중을 방해한다.  나루미와 신지의 이야기만으로 충분히 주제를 풀어낼 수도 있었을 것 같고, 깊이도 잡아낼 수 있었을 것 같은 그런 점에서 비슷한 분량으로 이분할된 이야기 구조는 아쉬움을 자아낸다. 이 아쉬움을 뺀다면 영화는 충분히 생각할 만한 가치와 깊이를 지닌다. 인간은 언어 속에서 사로잡혀 있다. 언어에 억압되기도 하지만 언어 속에서 행동하고 정의 되며, 사랑을 나눈다. 결국 인간적인 가치를 담은 수많은 언어는 인간을 억압하는 한편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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