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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사랑을 카피하다> 리뷰

현실로써의 영화, 영화로써의 현실.

제임스와 그녀가 진짜 부부인지 부부인 척 하는지는 알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보다 보면 앞부분이 부부 아닌 척 한 것인가라는 생각도 해본다.

제임스는 진품만큼 훌륭한 복제를 옹호한다. 그녀는 책의 팬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동생인 마리가 팬이다. 초반부를 보면 그녀는 진품을 옹호한다. 그녀는 팬이 아니지만 팬인척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찌보면 그녀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동생이라고 말하는 마리일 수도 있다. 그녀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이름이 나오는 것은 그녀의 동생이다. 그녀와 그녀의 동생 마리는 비슷한 혹은 같은 얼굴을 해도 관객은 모른다. 그녀가 진품을 좋아하는지 진품만큼 훌륭한 복제를 옹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어의 활용은 흥미로운 부분으로 다가간다. 부부연기 혹은 부부로 돌아가기 이전 그들은 영어로 대화를 한다. 복제를 옹호하는 남자와 진품을 옹호하는 여자. 하지만 부부연기를 시작하는 쪽은 진품을 옹호하는 그녀이다. 복제를 옹호하지만 원치 않게 부부연기 빨려 들어간 남자의 언어가 영어다. 하지만 부부연기를 시작하면 그들은 프랑스어로 대화한다. 복제를 옹호하지만 원치 않게 부부연기로 빨려 들어간 남자의 언어가 아닌 진품을 옹호하지만 주도적으로 복제가 되어버린 여자의 언어. 여기서부터 진짜와 가짜는 완벽하게 뒤섞인다.

처음 제임스가 그녀의 골동품 가게 들어간 순간. 그녀와 제임스의 대화에서 카메라는 제임스만 비춘다. 그녀의 모습은 제임스 뒤쪽에 거울을 통해서 보인다. 그렇다면 거울 속의 그녀는 진짜 그녀인가? 그 순간 거울 속의 허상으로 극의 주인공은 변한 게 아닐까? 관객이 보는 그녀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등장한 진짜 그녀가 아닐 수도 있다. 거울 속을 빠져 나온 가짜 그녀일 수도 있다.

이 영화 속 진짜와 가짜가 변화하는 순간에는 항상 프레임이 존재한다. 그들이 카페에서 부부로 오인 받고 부부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했을 때 그들은 위에 수도교가 있는 듯한 광장으로 향하는 문을 지난다. 화면 속의 또 다른 프레임을 뚫고 지나갈 때 가짜는 점점 더 진짜 같이 변한다.

둘은 광장에 있는 하나의 동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동상은 어느 프랑스인 노부부가 등장하기 전까지 카메라에 온전히 나타나지 않는다. 동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동상의 모습은 오로지 거울로 반사되어서 보일 뿐이다. 관객은 동상에 대해서 평가할 수 없다. 그들의 대화로 판단되고 빛을 통해서 거울이라는 스크린에 투사된 형상만 볼 수 있다. 마치 관객이 영화를 보는 듯하게 볼 수 있다. 주인공들의 대사, 사운드와 일련의 반사된 형태 그 것만이 관객에게 주어진다. 노부부는 동상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 평가한다. 순간 관객은 동상의 형태를 어렴풋이 나마 보게 된다. 노부부의 평가는 동상을, 그녀의 행동에 대한 해석을 제공한다.

영화라는 것은 자체가 허구이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진짜로 일어나지 않을 우리의 삶이 아닌 무엇에 대한 평가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강하게 작용된다. 허구에 대한 평가, 영화에 대한 평가 진짜를 흔드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 가짜, 허구는 진짜가 아니라 배척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것이 진짜에 영향을 준다면 그 것 자체로도 진짜가 아닐까?

성당의 문도 하나의 프레임이 된다. 특히 성당의 어둠은 그 의미가 진득하다. 어둠이라는 공간을 지나가는 순간. 그들은 온전히 진짜 부부가 된다. 그 전까지 제임스는 이 유희에 대한 확신이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성당 속 어둠을 지나는 순간 제임스도 그녀도 완벽한 부부로 변한다. 극장이라는 공간은 일견 과거의 종교적 공간과 유사성을 지닌다. 다수의 관객과 다수의 신자가 앉아 있고, 그 곳에서 영사기의 이야기 또는 목사 신부의 목소리를 통해서 신 또는 감독의 이야기가 흐른다. 어둠과 빛의 결합은 스크린 속 영상과 스테인드글라스의 이미지로 승화되었다. 성당이라는 공간은 어찌 보면 이 영화를 관객이 보고 있을 극장이라는 공간과 연결된다. 결국 종교의 공간은 영화의 공간을 상징하고 그 공간을 지나는 순간 관객과 완전히 가짜에 몰입한다.

결국 이들의 사랑은 결국 영화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화라는 허구를 진실로 인지하고 그것을 유희한다. 영화라는 예술은 본질적으로 허구의 예술이다. 벤야민이 영화에 주목한 가장 큰 이유는 기술복제의 시대 예술이라는 것이다. 원작의 아우라가 사라지는 시대 과연 원작의 아우라는 어떻게 볼 것인지. 진짜는 무엇인지 질문하였다. 그 핵심적인 공간이 극장이고 대상이 영화였다. 키아로스타미도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다. 영화라는 이야기, 그들의 사랑과 같은 허구는 과연 허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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