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 미상의 기록

by 김영욱

장모님은 자전거를 탈 줄 모르신다. 그래서 아내는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장모님께 자전거를 알려 드릴 계획을 세웠다.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문득 내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두발자전거를 배우던 시절, 아버지가 자전거를 뒤에서 잡아주던 시절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 아니었을까?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자전거를 붙잡고 있는 손을 절대 놓아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약속과 달리 아버지, 어쩌면 어머니는 자전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고, 난 그를 모른 채 제힘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 나갔다. 결국 얼마 안 가 넘어지고 말았지만, 그 덕에 홀로 자전거를 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얼굴은 아버지의 것이었나 어머니의 것이었나? 자전거를 붙잡는 건 힘쓰는 일이니, 아버지일 거로 생각했다. 자전거를 붙잡고 있는 척하면서 손을 떼 버리는 식의 장난도 아버지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뒤돌아보면 어머니가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버지를 향한 기억은 대개 희미했고 그래서 자꾸만 이리저리 뒤엉켰다.


나이가 들수록 내 어린 시절이 잊혀 간다. 애써 생각하려 하면 더 기억나지 않는다. 이번처럼 아주 우연한 기회가 기폭제로 작용하지 않으면 기억은 깊은 망각에 잠겨 있다. 하기야 젊었을 적에도 어린 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난 일부러, 지금의 나를 반면교사로 삼아,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자주 남기려 애써왔다. 그때의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내가 아니라 아이에게서 그 시절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게.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게도 옛 기억을 떠올릴 만한 거리가 있었다. 내게도 부모님이 찍어주신 사진들이 있었으니. 사진첩엔 내 어릴 적 모습이, 갓난아이인 나를 안은 채 웃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나를 어깨 위에 올린 채 당당히 서 있는 아버지의 사진이 있었다. 문제는 같은 사진,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부모님과 내가 떠올리는 기억이 달랐다는 사실이었다. 난 그 사진을 보면서 나를 키우며 겪어내야 했던 부모님의 노고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난 아주 작았던 내 모습과 지금의 나를 대비시키며 사진 속의 장소나 시간을 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젖먹이기의 어려움, 나를 오래 안을 때의 통증 따위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날 내가 아무리 많은 사진을 남겨 둔다고 해도 아이와 기억을 공유하기란 불가능했다. 아이와 나는 같은 사진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연상할 게 분명했다. 사건의 중심엔 오로지 '내'가 있을 뿐이니, 난 사진을 찍을 당시에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좋은 곳으로 다 같이 여행을 간다고 해도 그건 어른인 우리의 기분과 목적을 먼저 반영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아이가 어떤 사진에서 내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것을 찾아낸다 해도 난 그걸 이해해야 한다. 그게 내 부모가 걸어왔던 길이었고,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인 것이다. 조부모가 아무리 손주를 예뻐하며 힘들게 돌봐주어도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이를 손타게 해서 침대에 눕히지도 못한다'라는 자식의 질책이 아니었나. 실재했던 사실이란 해석 가능한 하나의 관점에 불과할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겠다. 네가 사진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떠올리더라도, 나의 사진, 그것은 아직 현상되지 않은 신원 미상의 기록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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