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는 몇 번의 힘든 이별을 경험하고 몸과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하여 또다시 누군가를 믿고 사랑할 수 있을까 주저하던 시기였다. 그 사이 의미 없이 흘러간 몇 차례 소개팅들이 나를 더욱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남자 친구는 검정 코트에 드라이가 잘 된 머리로 음식점 입구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소개팅을 많이 해본 터라 남자 친구와의 소개팅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들이 오고 갔다.
후식으로 케이크와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자리가 마무리가 되던 찰나 남자 친구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우리..
크리스마스에 한번 더 볼까요?!"
연말에 혼자면 참 외로울 거야... 크리스마스에 누구라도 같이 보낸다면 좋겠지...
근데 그게 이 사람이라면
.....
괜찮겠다!
"네 좋아요!"
우리는 그렇게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났다.
남자 친구는 보고 싶은 전시가 있다며 덕수궁으로 나를 데려갔다. 덕수궁 미술관과 주차장의 거리가 꽤나 길었는데 가는 길이 어찌나 춥고 바람이 많이 불던지.. 두 사람의 눈에 시린 눈물이 핑 고였다. 애프터 데이터 코스를 고민하고, 미리 전시를 예매하고, 추운 길 눈물을 흘리며 나를 안내해주던 그 사람의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박수근 화가의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는 전시를 보고 근처에 있는 베트남 음식점에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다. 식당에서 계속 크리스마스 재즈가 흘러나왔는데 남자 친구는 자신도 차에서 계속 크리스마스 앨범을 틀어놓고 다닌다고 했다. 따뜻한 저녁을 먹고 남자 친구는 1시간 넘게 걸리는 우리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집에 도착 해갈 무렵, 남자 친구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두 번 정도 만났는데...
저는 OO 씨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소개팅에서 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처받기 두려워 이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도 남자 친구의 가장 큰 매력은 감정에 솔직하다는 점 그리고 그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줄 안다는 점이다. 크리스마스에 기분 좋은 고백을 받고 헤어진 우리는 1월 1일 제야의 종이 울림과 동시에 연인이 되었다. 봄을 기다리며... 또 하나의 새로운 서사가 시작된 것이다.